문장웹진재미나요
기획
문학의 모든 고민-
기획 임국영 - 믹스테이프 원더월
믹스테이프 원더월 임국영 #1 인투로 (이승윤) 무대 위에 록 밴드가 서 있었다. 조명이 드리운 실내 공연장은 마치 화마가 뒤덮은 것처럼 새빨갰다. 땅속 깊은 곳에서 길어온 듯한 베이스 기타 소리가 인트로 라인을 열었다. 긴장감이 고조되자 보컬이 관객에게 정중히 알렸다.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주십쇼.” 보컬이 말을 끝맺자 일렉트릭 기타 두 대와 드럼이 달궈진 무쇠를 망치가 내려치는 듯한 굉음을 내뿜었다. 관중은 음악에 맞춰 고개나 손을 흔들고 환호성을 쏟아 냈다. 리듬을 따라 움직이던 나는 잠깐 내가 어디에 있는지 잊어버렸다. 연주 파트가 끝이 날 즈음 고개를 들자 코앞에 마이크가 놓여 있었다. 어? 이게 왜 내 앞에? 의문이 가시기 전에 나는 그간 매일같이 불러서 입술 끝에 달라붙은 가사를 발음하기 시작했다. 1절 후렴을 끝내고 나서야 온전한 기억을 되찾았다. 맞다. 내가 보컬이었지. #2 나는 왜 (못) “록 얘기 좀 그만 쓰면 안 돼요?” 코로나 시대에 접어들기 직전 어느 술자리에서 누군가 내게 말했다. 그 사람 말고도 직간접적으로 비슷한 조언을 했던 이들이 더러 있었지만 유난히 진지한 그의 태도에 자세를 고쳐 앉았다. 그의 논지는 다음과 같았다. 요즘 같은 시대에 록 같은 걸 누가 듣겠는가? 당신이 어떤 음악을 듣고 좋아하는지 아무도 관심 없다. 주구장창 똑같은 이야기만 하면 질리지도 않는가? 그날 술자리를 마치고 나서도 한동안은 그의 말에 사로잡혀 지냈다. 저기요 선생님, 내가 쓰고 싶은 거 쓰겠다는데 님이 뭐 어쩔 건데요, 하는 반발심이 든 것도 사실이었다. 으레 애주가가 적은 글에는 술이 등장하고 흡연가가 쓴 소설에는 담배 피우는 장면이 삽입되기 마련 아닌가. 작가에게 친숙한 소재가 작품에 반영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이다, 라는 항변을 스스로 되새겼지만 어쩐지 뒷맛이 개운하지 않았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음미해 볼 만한 화두임은 틀림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왜 소설을 쓸 때 늘 음악을, 특히 록을 소재로 삼는가. 어째서 한 번도 이 현상에 관해 의구심을 갖거나 깊이 성찰해 본 일이 없었을까? 나에게 록이란 무엇인가? #3 난 알아요 (서태지와 아이들) 당신 기억 속에서 가장 오래된 음악은 무엇인가? 라디오, 오디오 플레이어, TV와 컴퓨터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대중가요거나 부모님이나 유치원 선생님이 알려 주신 동요인가? 나의 경우는 카세트 플레이어에서 재생된 서태지와 아이들의 데뷔곡 〈난 알아요〉였다. 힙합 장르를 베이스로 한 댄스 팝에 메탈 요소가 가미된, 네 살 남짓한 꼬마한텐 여러모로 자극적인 노래였다. 얼마나 자극적이었냐면 노래를 듣는 순간 트랜스 상태에 빠진 샤먼처럼 눈이 뒤집혀서 별안간 춤을 췄을 정도였다. 이 소리는 도대체 무엇이기에 내 감정을 멋대로 조종하는 것인가! 나는 아직 만나 보지 못한, 얼굴도 모르는 이와 마치 하나가 된 듯한 감각에 빠져들었다. 이 곡을 듣고 있을 누군가와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작성일 2025-10-01 작성자 관리자 댓글수 0상세보기 -
기획 이훤 - 대나무 숲을 서성이는 고양이, 그리고 토마토
대나무 숲을 서성이는 고양이, 그리고 토마토 이훤 이번 여름 나는 지독한 갈증에 시달렸다. 하루 몇 컵씩 물을 마셔도 몸이 아우성쳤다. 더 많이 필요하다고 외치는 것 같았다. 이상할 정도로 몸이 약해졌다. 어쩌면 너무 많은 마음을 쫓느라 그랬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곤란해졌다. 물을 너무 많이 마시면 소화가 안 되고 소화가 안 되면 자연히 몸에 수분이 부족해졌다. 하여 또다시 갈증으로 이어졌다. 나는 이 일련의 과정이 내가 평소 불안과 맺고 있는 관계와 비슷하다는 생각했다. 잘 지내다가도 어느 날 갑자기 위태로워지곤 하는데, 무엇이 먼저였는지 모르겠다. 이미 내가 불안한 사람이었는지, 불안은 어디든 자라므로 그가 날 알아볼 수밖에 없었던 건지. 불안한 자는 취약해진다. 취약한 자는 더 불안해진다. 어떤 세계는 정확한 수순을 모른 채 이어진다. 불안과 느슨하게 잘 지낼 방법을 찾고 있다. 어차피 여기 오래 상주할 것 같다. 불화해 왔지만 같이 살아야 한다면 그를 반려해 버리겠다. 그런 각오로 방 한편에 앉혀 놓고 달래도 보고, 듣기도 하고, 어깨 위에 데리고 다니며 삼십여 년간 함께의 방식을 찾고 있다. 불안에도 여러 종류가 있다. 이유 없는 불안. 이유 있는 불안. 타인에게 건네받은 불안. 나의 말과 행동을 놓아주지 못해 자초하는 불안 등 모습을 달리한다. 불안은 상상하기 어렵고 형체 없어서 익숙하거나 귀여운 물성을 입혀 본다. 이름을 붙여 본다. 그러면 조금 더 친해진 것 같고‧‧‧ 어떤 식으로든 조화하는 듯 느껴진다. 이유 없는 불안은 증식을 멈추지 않는 대나무와 닮았다. 키우는 화분이 시름시름 앓는 여름에도 대나무는 쑥쑥 자란다. 땡볕을 견디며 성인 정강이만큼 큰다. 대나무 유형의 불안은 빠르게 자라고 빠르게 퍼진다. 들춰 보면 주변을 둘러싸고 있다. 출구를 모르는 숲에 터를 잡은 박새처럼, 나는 대나무 사이를 서성인다. 온갖 나무가 거기 자라고 있다. 내가 쓰이지 않을 거라는 기우. 종이책이 점점 덜 팔리고 희귀해져서 작가란 직군이 줄어들고 사진가마저 AI에게 대체될지도 모른다는 염려. 그리고 미래를 향한 온갖 크고 작은 걱정이 모두 여기 속한다. 근거 없이도 그들은 자란다. 잘 살고 싶어서 한 번씩 낫을 들고 그 앞에 선다. 뿌리부터 베기 시작한다. 어떤 날은 숲 전체를 뽑고 싶지만 참는다. 어차피 다시 자랄 것이다. 솎아 내면서 나무들을 한 그루씩 배우고 기록한다. 마음이 기우는 방식을 배운다. 박새가 계절의 풍향을 배우듯. 한편 실체 있는 불안은 재빨리 손을 빠져나간다. 마음을 더디게 알아차리는 사람은 언제나 늦다. 하루가 지나서야 알게 되기도 한다. 직업 때문에 생겨나는 불안도 있다. 작가들은 신간이 나왔을 때 책의 추이를 살핀다. 3년간 쓴 책이 세 달도 안 돼 잊히기도 한다. 중요한 행사에 모객이 잘되지 않을까 봐 마음 쓰기도 한다. 숫자보다는 거기서 일어나는 만남이 언제나 중요하지 않겠냐고 친구에게 말하고, 나도 가끔 돌아서서 북토크 예매 상황을 살핀다. 언제든 작가로서의 생활이 끝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서
작성일 2025-10-01 작성자 관리자 댓글수 0상세보기 -
기획 정다연 - 나의 반려 시
나의 반려 시 정다연 어린아이였을 때 나는 자주 빈집에 있었다. 학교를 마치고 돌아오면 맞벌이하셨던 부모님이 퇴근하실 때까지 혼자 보내는 시간이 많았다. 무료하게 창밖을 구경하거나 거실 소파에 누워 천장을 보다가 엄마가 간편히 먹을 수 있도록 준비해 둔 음식을 데워 먹었다. 익숙하게 빈 그릇은 싱크대에 넣어 두고 티브이 켜 두고는 화면에서 흘러나오는 소리를 백색소음 삼아 일기를 쓰고 숙제를 했다. 그러고도 시간이 남으면 부모님 냄새가 밴 이불을 파고들며 낮잠을 잤다. 눈을 뜨면 여전히 아무 무늬 없는 흰 벽지가 사방으로 펼쳐졌다. 일상의 곳곳이 자주 비어 있었기 때문에 늘 무언가로 채우고 싶었던 걸까. 한동안은 무언가를 모으거나 기르는 데 열중하기도 했다. 첫 시작은 개미였다. 놀이터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개미를 채집통에 담아 와 길러 보겠다고 떼를 썼다. 오후 내 그 안을 관찰하다가 어딘가에서 개미가 좋아한다고 들었던 과자 부스러기나 과일 껍질을 넣어 주기도 했다. 또 한동안은 머리끈에 달린 유리구슬만 모았던 적도 있었다. 간직하고 싶은 구슬을 모으기 위해 부모님 몰래 멀쩡한 끈을 가위로 자르기도 했다. 그 후로도 무언가를 애착하는 일은 계속됐다. 애니메이션 〈101마리의 달마시안 개〉에 푹 빠져 달마시안 인형을 수집하기도 했고, 조금 더 커서는 백문조를 기르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일들이 내 마음의 구멍을 온전히 채워 주지는 않았다. 아무리 좋아하는 인형으로 방을 꾸미고 반려동물에게 말을 걸어도 그 구멍은 여전했다. 다른 방식으로도 삶을 채울 수 있다는 걸 알게 된 건 한 친구를 만나게 되면서였다. 그 친구는 나와 이름이 한 글자만 달랐다. 우리는 그게 친해질 이유라도 된다는 듯이 매일 같이 붙어 다녔다. 서로의 집 주변을 오고 가면서 누구와 친했고 멀어졌는지, 아무리 애써도 잘 고쳐지지 않는 습관은 무엇인지 이야기했다. 같은 보습 학원을 등록하고 친구가 학원에 가지 않으면 나 역시 가지 않았다. 하루는 공원 벤치에 앉아 어른이 되면 무얼 하고 싶은지에 대해 떠드는데, 친구가 맑은 얼굴로 고백하듯이 말했다. 나는 시를 쓰고 싶어. 시가 좋아. 친구가 좋아한다는 시가 무엇인지 궁금해서 며칠 뒤 글쓰기 학원에 따라갔다. 그때 친구를 통해 알게 된 시는 그전에 배운 것과는 완전히 달랐다. 감정이나 대상에 대해 느낀 걸 있는 그대로 쓰면 되었다. 나와 친구가 쓰는 문장은 하나의 답으로 고정되지 않았다. 한 편의 작품을 읽고서도 감상과 해석이 달랐다. 그건 얼마든지 나의 시선으로 세상을 구부리고 펴서 말해도 된다는 걸, 고스란히 받아들여질 수 있다는 걸 의미했다. 또 하나 마음에 들었던 건 시가 그것을 읽는 이들까지 염두에 둔다는 거였다. 혼자만의 생각에 갇히는 대신 시 속에 타인이 오고 갈 수 있는 문을 내어 함께 생각을 나눌 수가 있었다. 읽고 쓴다는 감각이 가볍고 자유로웠다. 시라는 문을 통해 나의 안과 밖을 드나들 수 있다는 걸 그때 알게 됐다. 그 후로 나도 시를 배우기 시작했다. 전에는 깊이 생각해 본
작성일 2025-10-01 작성자 관리자 댓글수 0상세보기 -
기획 편혜영 - 무한히 증가하는 숫자의 방
무한히 증가하는 숫자의 방 -서유미 「검은 문」 (문장웹진 2012년 3월호 수록) 읽기 편혜영 「검은 문」을 처음 읽을 때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문’이자 ‘벽’에 관한 정보이다. ‘문에 손을 대지 않는다’를 규칙으로 가진 이곳은 소등 후에는 방 사람들이 돌아가며 출구 앞에서 불침번을 서는 규칙-그러고 보면 규칙이 많은 곳이다-을 가진 공간이기도 하다. 갇힌 사람들은 출구로 끌려 들어가면 죽는다는 두려움을 품고 있어서, 출구 밖에는 무엇이 있는가에 대한 질문을 품고 소설을 읽게 된다. 오랜 시간이 지나 이 소설을 다시 읽을 때도 이 생각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지만 ‘문’보다는 ‘숫자’를 유심히 들여다보게 되었다. 한 방에서 수감 생활을 하는 세 사람, 211번, 123번, 99번은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끊임없이 벽돌을 돌리며 의미 없이 ‘숫자’를 올리는 작업에 몰두하며 시간을 보낸다. 세 사람은 아침에 일어나면 진한 향을 풍기는 박하 맛 사탕을 습관처럼 먹으며 손잡이를 돌리고 숫자를 증가시키는 무의미한 노동에 열중하며 하루를 보낸다. 도대체 숫자만 끝없이 증가하는 벽돌의 손잡이 돌리는 노동은 왜 계속하는 걸까. 이 단순한 노동의 반복이 그들에게 즉각적인 대가를 건네주는 것은 아니다. 그저 ‘노동’은 좁고 무료한 공간에서 그들의 존재 의미를 형성하는 요소일 뿐이다. 중요한 것은 더 큰 숫자를 얻고 싶다는 갈망이다. 세 사람은 하루 종일 손잡이를 돌리면서 존재의 의미를 찾고 마음의 평화를 회복한다. 원하는 숫자에 닿지 못하면 부족한 수만큼 불행해진다. 하지만 열심히 돌려도 원하는 숫자는 항상 앞서 있기 때문에, 아무리 손잡이를 돌려 대도 원하는 숫자를 따라잡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무엇보다 간수의 명령에 따르지 않으면 자신이 그동안 쌓아놓은 숫자는 원점으로 돌아가고 만다. 이들은 끊임없이 손잡이를 돌리며 숫자가 올라가는 것을 확인하는데, 이는 단순히 시간을 소비하는 행위를 넘어서 자신의 존재를 입증하기 위한 중요한 행위가 된다. 다른 할 일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는 이 공간에서 숫자에 대한 집착이 갇힌 자들에게 삶의 ‘목표’가 되기 때문이다. 그들이 이 공간에서 취할 수 있는 유일한 성취는 조금이라도 높은 숫자를 획득하는 것뿐이다. 숫자가 올라가거나 목표한 숫자에 도달했다고 해서 갇힌 자들의 삶이 달라지거나 실질적인 변화가 야기되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맹목적으로 숫자를 올리는 일에 매달린다. 숫자는 그저 그들이 이곳에서 존재하게 만드는 규칙에 지나지 않음에도 그들은 이 규칙을 따라 무료하고 무의미한 체계에 질문을 던지지 않고 체계와 처지에 순응하며 살아간다. 이 소설에서 유일하게 폭력이 발생하는 부분도 이 지점과 관련되어 있다. 간수들은 숫자를 통해 세 사람의 행동을 통제한다. 표면에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마치 어떤 &lsqu
작성일 2025-10-01 작성자 관리자 댓글수 0상세보기 -
기획 고봉준 - 삶은 곡선이다
[문장웹진 REWIND] 삶은 곡선이다 -염승숙의 「곡선을 걷는 시간」(《문장 웹진》 2009년 8월호) 고봉준(문학평론가, 前 문장웹진 편집위원) 염승숙의 「곡선을 걷는 시간」은 ‘곡선’에 관한 이야기이다. 여기에서 ‘곡선’은 작가가 의도적으로 선택한 단어이며, 이때의 ‘곡선’은 ‘직선’이 아닌 것, ‘직선’과는 다른 것이라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그러므로 ‘곡선을 걷는 시간’이라는 제목은 이미-항상 대척점, 즉 ‘직선을 걷는 시간’을 전제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이는 ‘직선’과 ‘곡선’의 관계를 염두에 두고 이 소설을 읽어야 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곡선을 걷는 시간」은 ‘곡선’의 의미를 해석하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부러 그렇게 만들어진 경우를 제외하면, 세상 모든 휘어진 것들엔 다 그만한 이유가 있다.”라는 진술이 그것이다. 여기에서 휘어진 것이란 “노인의 굽은 등과 허리, 사춘기 아이의 비뚤어진 성격이나 오래된 연인들의 등 돌린 마음, 사고에 의해 부러진 뼈, 아주 추운 겨울날 주머니 안에서 곱아드는 손, 허리가 꺾인 붓의 단면 등”처럼 유무형의 곡선 형상을 모두 포함한다. 곡선에 대한 화자의 해석은 “부러 그렇게 만들어진 경우를 제외”하므로 결국 여기에서의 ‘곡선’은 원래는 곡선이 아니었던 것이 어떤 이유에 의해 휘어졌다는 의미이다. 화자는 “어쩌면 휘어진다는 건 ‘충격’의 다른 이름일지도 모르겠다.”라는 진술처럼 그 이유를 정신적․물리적 ‘충격’에서 찾는다. 요컨대 화자에게 ‘곡선’이란 원래는 곡선이 아니었던 것이 정신적․물리적 충격을 받아 휘어진 것이며, 따라서 그것들은 이전 상태의 회복, 즉 “곧아지기 위해 일생을 견뎌야 하는 불행한 존재들”로 인식된다. 이 소설의 핵심적인 사건은 주인공이 “내 아버지의 집이며, 내 어머니가 마지막까지 붉게 웃다 떠난, 그런 공간”으로 돌아온 것, 즉 귀향(歸鄕)이다. 이때 ‘귀향’은 고향에 돌아왔다는 공간적․장소적 의미보다 ‘아버지’라는 존재를 긍정한다는 정신적 의미에 가깝다. 사춘기 시절의 ‘나’는 아버지에 대해 “이유 없는 분노”를 갖고 살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것은 “제아무리 팽개쳐도 부서지거나 깨어지지 않는 내 아버지란 사람에 대한, 결코 빠져나갈 수 없는 굴레 같은 것을 알아 버린, 사춘기 아이의 치기(稚氣) 같은 것.”이었다. 아버지에 대한 “이유 없는 분노”는 아홉 살 무렵 엄마가 식도암으로
작성일 2025-09-01 작성자 관리자 댓글수 0상세보기 -
기획 최하연 - 얼음이 어는 순간과 얼음이 녹는 순간, 그 슬픔의 음역
[문장웹진 REWIND] 얼음이 어는 순간과 얼음이 녹는 순간, 그 슬픔의 음역 -강성은의 「고딕 시대와 낭만주의자들」(《문장 웹진》 2008년 6월호) 최하연(시인, 前 문장웹진 편집위원) ‘글의 출발점으로 돌아가 생각하면―.’ 떠오른 첫 문장은 이랬다. 이 첫 문장의 그 앞 문장은 없으므로, 돌아갈 곳이 없으니, 불능의 세계인데, 나는 없는 출발점으로 자꾸 돌아가고 있다. 어쩌면 나는 몇 덩어리의 문장을 쓴 뒤에, 원래의 첫 문장을 지우고 다시 썼는지도 모른다. 쓰던 글을 재차 읽어 가며 마지막 문장을 쓰고 나면, 그땐 첫 문장을 또 고치게 될까. 그렇게 고친 문장이 사실 저 앞의 문장이라면―아니 고친 뒤에 읽어 보니 아까 것이 나은 듯싶어 고민 끝에, 원래대로 돌려놓은 문장이라면―출발점 없는 출발점은 글 안에 있고, 여전히 불능한 첫 문장은 불능을 모른 채 남게 될 것이다. 2008년 5월호 문장 웹진엔 강성은의 시 「고딕 시대와 낭만주의자들」이 실려 있다. 이 글의 진짜 출발점은 사실 여기이다. 뾰족한 첨탑 위에 갇힌 누군가 구름에 편지를 써요 그럴 때 구름은 검은 빗방울을 뚝뚝 떨어뜨리지요 구름의 얼룩진 편지를 읽은 어떤 이들은 울음을 멈추고 검은 강물 속으로 몸을 던집니다 도시엔 무서운 전염병이 돌고 녹색의 박쥐 떼가 공중을 날아다닙니다 창백한 입술을 잃은 자들은 곧 두 손과 머리털을 잃고 두 눈알과 심장을 잃었지요 점점 희미해져 우리는 우리를 잃었지요 당신과 나의 비밀 이야기는 입속에서 입속으로 공기와 밤의 중얼거림을 통과하고 얼룩진 편지는 얼룩 고양이가 물고 밤의 담장 너머로 사라집니다 우리는 내일의 날씨를 예측할 수 있지만 내일의 악몽을 점칠 수는 없었어요 빗방울은 때로 격렬하게 내립니다 한 방울 뒤에는 수천만 우주의 모든 물방울들이 뾰족하고 오래된 첨탑 위의 편지는 전해 오는 이야기 속에서 날마다 더 아름다워져 갑니다 우리는 첨탑 위로 답장을 보내는 법을 모르고 얼음이 어는 순간과 얼음이 녹는 순간 슬픔의 음역을 영원히 알 수 없겠지만 -「고딕 시대와 낭만주의자들」 전문 회고가 실패의 알리바이를 지워 내듯, 전망이 이 지울 수 없는 실패의 유예이듯, 지속 가능한 내일에 대한 일반의 믿음 또한 불능을 모르는 불능의 세계이다. 이 세계는 언제나 힘이 셌다. 우리는 그것을 산문의 세계로 불렀고, 시는 산문의 세계로부터 이격해 갈 수 있는 가장 먼 곳까지 나아가 그곳에서 늘 첫 문장을 시작하고자 한다. 그러나 우리가 “내일의 날씨를 예측할 수 있지만/ 내일의 악몽을 점칠 수는 없”는 것처럼, 그렇게 시작한 시는 늘 자신의 의지와는 다르게 산문의 세계로 붙잡혀 돌아오는 “내일의 악몽”이다. 이 정황에는 하나의 커다란 허방이 있다. 누가 누의 내일이 될 수 있는가. 혹은 되어야만 하는가. 시인은 “얼음이 어는 순간과 얼음이 녹는 순간 슬픔의 음역”을 발견한다. 그런데 빙점은 과연 물의 내일일까, 얼음
작성일 2025-08-01 작성자 관리자 댓글수 0상세보기 -
기획 유지혜 - 스물의 체스
[에세이] 스물의 체스 유지혜 생애 처음 체스를 배웠다. 체스는 내 왕을 사수하면서 상대의 왕을 공격하는 전략 게임이다. 내 편에는 총 16개의 기물이 주어진다. 앞줄에는 폰(pawn)이 줄지어 서 있고, 뒷줄에는 왕, 퀸 등 다양한 말들이 대칭을 이루며 자리하며 각 기물마다 고유한 움직임이 있다. 킹(king)은 거창한 이름과는 달리 움직임이 적다. 생존이 최우선 인지라 보통 다른 말들의 보호를 받으며 자리를 보존한다. 반면 작은 몸집으로 제일 많이 싸우는 건 앞줄의 작은 말 폰(pawn)이다. 그러나 나는 폰의 쓸모를 무시했다. 한 칸씩만 움직이는 폰이 지루했기 때문이다. 대각선을 가로지르는 비숍(bishop)으로 판을 압도하고 싶었고, L자로 움직이는 나이트(knight)로는 상대가 시야에서 놓친 구석을 공격하고 싶었다. 그러니까 나는 근사하고도 빨리 이기고 싶었다. 결국 큰 말을 무리하게 내세우다 졌다. 그때 게임을 같이 두던 상대가 내게 말했다. 폰, 이 쫄병을 쭉쭉 내보내는 것도 중요해. 하찮아 보여도 얘가 뭘 지켜줄지 몰라. 체스판처럼 인생에도 전략과 기세, 무엇보다 여러 번의 기회가 필요하다고 나는 생각했다. 너무 빨리 망하지 말라고, 인생에는 젊음이라는 폰이 주어지는 줄도 모른다. 폰처럼 젊은 날은 가치는 적은 대신 여러 개이기 때문이다. 아직 무엇이 될지 모르는 인생의 한복판에서 기껏해야 한두 걸음 내딛는 시기. 젊음은 헐값에 좋은 것을 쟁취할지도 모를 기회이다. 하지만 스물엔 그 누구도 전지적 작가 시점에 있지 않다. 앞수를 읽는 노련함은 없다. 가장 작은 몸집으로 큰 세상을 향해 나가는 폰의 시점일 뿐이다. 스스로의 위치조차 가까스로 가늠할 수 있을 뿐. 좀 더 가면 헐값에 잡아먹힐 것 같다는 불안이 몰려올 수도 있다. 더 대범했어도 되었다는 건 순전히 그 시기를 지난 사람들의 이야기다. 갓 성인이 된 2011년, 나에게도 스물이라는 핑계로 얼떨떨한 용기를 냈던 기억이 있다. 나는 대학에 진학하지도, 술을 마시지도, 첫 애인을 사귀지도, 여행을 가지도 않았다. 대신 압구정에 있는 모델 학원을 등록했다. 어릴 적부터 사람들은 키가 크고 마른 체형인 내게 모델을 권했기 때문이었다. 지망했던 대학에 불합격한 나에게는 아득할 만큼 시간이 많았다. 뉴코아 아울렛에서 5만원을 주고 산 빨강색 게스 구두를 신고 몸매를 드러내는 옷차림의 나는 한쪽 벽 전면이 거울인 연습실에서 워킹을 연습했다. 우리 기수에는 타고난 것으로 먹고 살고자 하지만 그렇다 할 독기는 보이지 않는 이십 대 초반 언저리의 남녀가 모여 있었다. 자신감이 충만한 건지 없는 건지 분간하지 어려운, 겉멋이 잔뜩 들었지만 그로 인해 활기찬 사람들이었고 나도 그중 하나였다. 몇몇 친구들과 나는 금세 친해졌다. 그들은 당시 유행했던 발렌시아가 가방을 어디서 제일 싸게 구할 수 있는지를, 자신에게 잘 어울리는 립스틱의 품명을, 이마 보톡스의 효과를 알았다. 그들은 어른의 세계에 진입한 이들이었으나 나는 아니었다. 다들 택시를 타고
작성일 2025-08-01 작성자 관리자 댓글수 2상세보기 -
기획 고수리 - 날마다 한 걸음
[에세이] 날마다 한 걸음 고수리 상경했던 날을 기억한다. 버스를 타고 다섯 시간을 달려 강남터미널에 도착했다. 대합실을 나서자마자 길을 잃었다. 인파 속에 덩그러니 나 혼자. 서울 한복판에 뚝 떨궈진 미아가 된 기분이었다. 서울의 첫인상은 삭막한 회빛, 그리고 몹시 추웠다. 눈이 푹푹 내리던 강원도는 사방이 희고도 따뜻했는데. 나는 목도리를 둘둘 고쳐 매고 한 걸음 내디뎠다. 서울은 복잡하구나. 시끄럽구나. 무심하구나. 아무도 웃지 않는구나. 애꿎은 지하상가를 헤매다 얽히고설킨 출구를 빙빙 돌다가 겨우 개찰구를 찾아 전철표를 샀다. 전철을 타 보는 것도 혼자선 처음 해 보는 일이었다. 덜컹덜컹 흔들리는 전철 손잡이를 붙들고 서서 노선도를 올려다보았다. 풀빛으로 주욱 이어진 선을 따라 도착할 역사는 ‘온수(溫水)’. 따뜻한 물이라는 이름이 그나마 위안처럼 스몄다. 온수역에 내려 자취방을 찾아갔다. 대로변 가로 이어진 인도를 한참 걸어가다가 멈춰 섰다. ‘안녕히 가십시오’라고 새겨진 해태상을 맞닥뜨렸을 때, 기이한 위화감에 사로잡혔다. 돌아보니 ‘안녕히 가십시오 서울특별시입니다’라는 표지판이, 바로 맞은편에는 ‘어서 오십시오 경기도 부천시입니다’라는 표지판이 보였다. 나는 경계에 서 있었다. 아니, 이 기이한 기분의 실체는 기시감일지도. 불안하고 난처한 마음 한구석에 익숙하고도 지긋한 체념이 몰려왔다. 나는 한숨을 몰아쉬었다. 그리고 서울과 부천 사이에 그어진 경계선을 한 걸음 넘어섰다. 거기에 내가 살 방이 있었다. 내 사정 역시 고학생들의 유구한 상경의 역사와 다를 바 없었다. 서울에 있는 대학에 들어갔고, 집안 형편이 어려웠고, 집세는 감당할 수 없으니, 학교 근처에 가장 싼 방을 수소문해 들어갔다. 상경해 처음으로 얻은 방은 월세 18만 원짜리 남녀공용 고시원 방이었다. 한낮에도 침침한 복도를 걸어가 방문을 더듬어 열 때마다, 엄마가 이 방을 안 봐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형광등부터 켰다. 창문 없는 길쭉한 방. 방문을 걸어 잠그고 웅크려 누우면 어둡고 눅눅한 관 속에 눕는 기분이었다. 얇은 합판을 덧대어 가른 방은 방음이 되지 않았고, 간간이 들리는 기침 소리와 통화 소리, 텔레비전 소리에 사람들이 나란히 누워 살아 있구나 실감했다. 아침마다 등교하는 대학교는 서울시 구로구 온수동에 있었다. 밤마다 돌아가는 고시원은 경기도 부천시 원미구에 있었다. 나는 어디에 속한 사람이라 할 수 있을까. 고등학교 시절에도 그랬다. 전라북도 익산시에서 3년을 유학하고, 졸업 후에 잠시 강원도 삼척시에서 지냈다. 삼척은 엄마의 고향이자 내가 중학교 시절을 보냈던 도시지만, 거기도 선뜻 내 고향이라고까지 말하긴 어려웠다. 나는 오래전부터 떠돌며 살았다. 아무도 모르게 함구해야 할 사정이란 게 삶을 짓누를수록 나는 가벼워져야 했다. 짐 하나만 꾸리면 잠시나마 살아갈 사람처럼, 짐 하나만 꾸리면 언제라도 사라질 사람처럼. 갑작스럽고 비밀스럽게
작성일 2025-08-01 작성자 관리자 댓글수 0상세보기 -
기획 서솔 - 담배와 새치
[에세이] 담배와 새치 서솔 S#1. 아파트 앞의 오피스텔 화단 멍하게 앉아 있던 여자. 무언가 떠오른 듯 가방을 뒤진다. 가방 앞주머니에서 빨간색 말보로 담배와 라이터를 꺼낸다. 여자는 머뭇거리며 담배 한 개비를 꺼내 손에 쥐어 보지만 불을 붙일 용기는 없다. 한참을 머뭇거리던 여자는 담배를 구겨 가방에 넣는다. 부러진 담배에서 재가 쏟아진다. 스무 살, 나는 이모 집에 얹혀살았다. 그곳에 들어가자마자 받았던 가장 큰 충격은 발바닥을 뜨겁게 데우는 화장실 대리석의 온기였다. 화장실 바닥에 보일러가 들어올 수 있구나. 그것은 ‘폐업’ 종이가 붙어 있는 단골 카페를 마주한 것처럼 하루아침에 세상이 바뀌는 사건이었다. 방배동의 방 네 개짜리 브랜드 아파트에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몸속까지 가닿는 훈기가 있었다. 그러나 그 시절 내 마음에는 야멸찬 비바람만이 몰아쳤다. 흔쾌히 방을 내준 이모가 지금 듣는다면 뒤통수가 얼얼한 이야기일지도 모르겠지만 그 무렵 나는 어떻게든 집에 늦게 들어가기 위해 아파트 주변을 배회했다. 야심한 시각에 일어나는 술자리에 굳이 참석한다든지, 카페베네에 앉아 고등학교 친구들에게 시시한 문자를 보내곤 했다. 이모와 이모부가 잠든 사이 들어가는 것이 하루를 끝마치는 일과였다. ‘이모에게 빚을 지고 있다’라는 빚쟁이의 감각은 해가 지면 더욱 선명해졌다. 선명해질수록 무거워지는 감각은 나를 언제나 주눅 들게 했다. 등록금이 너무 비싼 예술대학에 입학한 것은, 아무래도 그 시절 나에게 큰 짐이었다. 아직 두 살 터울의 언니가 졸업하지 않은 시점. 먼저 미대에 진학한 언니를 따라 덩달아 영화과에 진학한 나는 나의 선택이 우리 집의 기둥을 뽑아 먹을까 봐 입학 전부터 전전긍긍했다. 그러면 조금 눈을 낮춰 장학금을 받은 학교에 진학했어도 됐다. 그러나 나라는 인간은 선뜻 욕심과 타협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결국 타협보다는 욕망을 선택한 나는, 그때부터 대가를 치러야 했다. 수능이 끝난 친구들이 하릴없이 시간을 죽일 때, 엄마 친구 딸들의 집을 전전하며 영어 과외를 했다. 그렇게 ’입학하면서 용돈을 받지 않은 나’라는 타이틀을 거머쥐고 이모 집으로 들어갔다. 내방역 3번 출구에서 나와 언덕에 있던 아파트로 올라가던 길. 하늘에 보이지 않는 별을 억지로 찾던 의미 없는 행동은 발걸음을 늦추기에 제격이었다. 서울의 밤은 언제나 칠흑같았다. 이렇게 진행되는 에세이는 무릇, 그 시절 내가 겪었던 슬픈 사연이 등장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그 얘기를 하려는 건 아니다. 에세이 주제로 전달받은 ‘스무 살’ 키워드에서 떠올랐던 건, ‘스무 살의 내가 지녔던 비대한 자아’뿐이었다. 당시 나를 구성하고 있는 여러 가지 자아 중, 내가 가장 중요하게 지녔던 것은 ‘나 때문에 엄마 아빠가 너무 고생할 것‘이라는 명제였다. 거기서 오는 자기연민과 우울에는 세상의 중심이 나의 우울함
작성일 2025-08-01 작성자 관리자 댓글수 4상세보기 -
기획 조경란 - 응원의 방식
[문장웹진 REWIND] 응원의 방식 -염승숙, 「지도에 없는」 (《문장웹진》2007년 4월호) 조경란(소설가, 前 문장웹진 편집위원) 좋은 소설에 대한 사적인 기준 단편소설 「지도에 없는」을 지금까지 세 번 읽었다. 처음엔 2007년 4월에 《문장웹진》에 수록되었을 때, 두 번째는 이듬해 염승숙이라는 젊은 작가의 첫 소설집 『채플린, 채플린』에서, 그리고 세 번째는 이 글을 쓰려고 준비하면서. 앞에 두 번을 읽었을 때는 나도 아직 중견작가라고는 불리지 않을 시기였고, ‘소설’에 대해서 지금보다는 잘 알지 못하기도 했을 것이다. 그 시절이 주변을 둘러볼 새 없이 바삐 뛰면서 소설을 쓰던 시기라면 지금은 느리게 걸으며 소설을 쓰는 시간보다 소설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이 더 길어졌다고 표현하면 되려나. 어느 면으로 소설에 대한 나의 견해나 취향, 좋은 소설에 대한 기준이 약간은 달라졌을 것이다. 그런 눈으로 「지도에 없는」을 세 번째로, 거의 처음 읽는 소설처럼 읽었다. 솔직히 말해서 어쩌면 나는 예전에는 이 단편을 나의 취향이 아니라고 쉽게 여겨 버렸을지 모른다. 이야기나 인물보다는 여러 가지 소설적 요소의 완결성과 미학적인 면에 더 집착하기도 했던 시기였으므로. 소설이 어떤 메스(mess), 즉 그것이 크기와 상관없이 ‘엉망인’ ‘헝클어진’ 상황에 인물이 놓이고 거기서 출발한다고는 여전히 여긴다. 그 메스가 작으면 작은 대로 조용히 파동하는 미니멀리즘 이야기에 가까우며 메스의 크기가 크면 큰 소동, 리얼리즘에 가까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최근에 하게 되었다. 말했지만, 지금의 나는 작가로서 소설을 쓰는 시간보다는 소설이란 무엇일까? 소설이란 어때야 할까? 좋은 소설이란 무엇을 갖추고 있어야 하는가? 라는 질문에 몰두하면서 더 긴 시간을 보내는 편이라 떠오르는 대로 이런저런 단상을 메모해 두곤 한다. 그래서 소설에 대한 나의 이러한 생각이 맞는지 틀리는지 사실 알지 못하지만 내가 생각하기에 좋은 소설이 갖춰야 할 조건들은 요즘은 이렇다. 이야기의 중심에는 인물이 있어야 하며, 그 인물을 둘러싼 공간을 시각적으로 보일 만큼 세심하게 구축해야 하고, 인물이 맞닥뜨리게 된 ‘상황’을 작가 자신만의 방식으로 풀어내어 결말에 그 과정을 통해서 하고 싶었던 의미(meaning)가 작게라도 내포된 소설. 그리고 여기에 또 한 가지. 시대를 담고 있을 것. 그런 개인적 기준을 가진 상태에서 「지도에 없는」을 세 번째로 읽게 된 셈이다. 그래서 놀랐다고 할까, 그리하여 놀랐다고 할까. 당시 첫 책도 내지 않았던 젊은 작가 염승숙은 혹시 십팔 년 후에도, 하루하루 힘들게 살아가는 이십 대 청년들의 삶이 미래에도 변하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이미 내다보고 있었던 건 아닐까? 해서. 누구에게나 방이 필요하지만 중심인물인 이십구 년 차 중개업자인 김 씨는 “햇빛이 잘 들고 보증금 천오백만 원 정도의 방을 원하는&rdquo
작성일 2025-07-01 작성자 관리자 댓글수 0상세보기 -
기획 서경석 - ‘안 가느니만 못했던 여행’의 가치
[문장웹진 REWIND] ‘안 가느니만 못했던 여행’의 가치 - 한창훈, 「삼도노인회 제주여행기」(《문장웹진》2007년 5월호) 서경석(문학평론가, 前 문장웹진 편집위원) 2025년 3월에 2007년을 읽는다. 그 해 에 수록된 소설들. 작품을 마주하니 새삼스러웠다. 김재영, 명지현, 한창훈이 눈에 띈다. 김재영의 소설은 중년 남성의 퇴직 후 삶을 그린 이야기였다. 「달을 향하여」는 『폭식』의 작가가 달나라 땅도 팔고 사는 세태를 작품의 마무리로 삼았던 작품이다. 모든 것이 ‘쓸쓸하게’ 돈에 포섭되는 폭식의 세상을 그렸다고 생각했다. 이제 다시 읽으니 소설 속 주인공이 퇴직하고 갈 곳을 찾지 못해 회현동 골목길을 이리저리 살피며 걷는 모습이 더욱 눈에 들어온다. 지나온 삶을 되돌아보며, 고향처럼 아늑하고 친밀한 장소가 주는 위로가 느껴진다. 어린 시절의 안식처에 대한 추억이 작품의 주된 정조를 이루어, 마치 새로운 작품을 읽는 듯하다. 명지현의 작품 「입안의 송곳」은 지금 다시 읽어도 ‘변함이 없다.’ 앓던 이‘는 누구에게나 있으며, 누구나 끊임없이 앓고 있고 세상 속 우리의 삶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인간에게 편안하고 충만한 삶의 안식처가 어디 있겠는가. 삶의 근원적인 딜레마 속에서 마음의 고향을 찾아 헤매는 부조리한 몸짓만이 있을 뿐이다. 야생의 인간처럼 뭔가를 계속 씹으며 서먹한 힘으로 다가오는 세상에 저항할 따름이다. 한창훈의 소설 「삼도 노인회 제주 여행기」는 진정한 고향 이야기이다. 섬사람들의 이야기를 섬사람이 전하니 더욱 그러하다. 작가 한창훈은 거문도가 그의 고향이다. 어린 시절 그는 ‘세상은 몇 이랑의 밭과 그와 비슷한 수의 어선, 그리고 넓고 푸른 바다로만 이루어져 있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일곱 살부터 낚시를 했으며, 외할머니에게 잠수를 배웠다고도 한다. 그는 먼 곳, 먼바다를 떠돌다 거문도로 돌아와 글을 쓰고 이웃들과 어울려 살아간다고 스스로 밝혔다. 그의 말처럼 그는 바다를 배경으로 한 변방의 삶을 주로 탐구한다. 그러므로 이 작품은 그의 작품 세계의 중심에 놓여 있다. 이제 내용을 살펴 그 의미를 깊이 새겨 보자. 작품의 배경이 되는 삼도는 남쪽 바다의 한 섬이다. 젊은이들은 모두 도시로 떠나고, 오직 ‘늙은이들’만이 남아 섬을 지키고 있다. 지킨다기보다는 떠날 수 없어 살아가는 것이다. 이 노인들에게 섬은 삶의 터전일 뿐만 아니라, 그들의 원초적인 삶의 뿌리이다. 벗어날 수도 없고, 설령 벗어난다 해도 그 몸에 새겨진 섬 생활의 그리움 때문에 곧 되돌아오고 마는 곳이다. ‘고단할지라도 섬을 버리고 자식들에게 가는 것은 멀쩡한 배에 구멍을 내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이다. 이곳에서의 삶은 자연의 질서와 공동체의 관습, 그리고 어민으로서의 노동이 조화롭게 어우러진 ‘고향’인 것이다. 그러니까 떠날 수 없는 세대와, 어떡해서든
작성일 2025-06-01 작성자 관리자 댓글수 0상세보기 -
기획 신용목 - 우리의 기원이 우리의 전부를
[문장웹진 REWIND] 우리의 기원이 우리의 전부를 ― 조연호, 「저녁의 기원」, 《문장웹진》 2005년 08월호 신용목(시인, 前 문장웹진 편집위원) 1. 기원은 어디에 있는가? 그것이 도달할 수 없는 시작의 불가능한 기억으로 구성된 곳이라면 응당 과거의 한 지점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을 가능하게 만드는 어떤 힘의 발원을 일컫는 것이라면, 기원이 꼭 과거로 달려가 맞이하는 마지막 도착점일 이유는 없을 것이다. 말하자면 이곳의 삶을 담보하는 것이면서 동시에 지탱해 주는 것. 끝없이 현재를 보채는 것. 우리의 자리를 만들기 위해서 우리의 바깥을 어둠으로 채워 놓은 것. 달려가면 달려가는 만큼 따라오는 해와 달 같은 것. 말하자면 기원은 내 몸의 외피에 꼭 맞는 공기이거나 내 기억을 감싼 테두리, 낭떠러지 허공이거나 캄캄한 망각일지도 모르는, 그러나 그 경계의 여리고 연한 막으로 떨리며 우리를 있게 하는 것. 어쩌면 미래라는 이름으로 존재하는 모든 불안과 불편과 불쾌가 불시에 우리를 깨우며 우리에 대해 묻는 것.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아무리 달아나도 멀어질 수 없으므로. 아무리 발버둥 쳐도 놓여날 수 없으므로. 아무리 깊은 슬픔과 절망 뒤에 숨어도 뚜벅뚜벅 적막한 밤길을 걸어와 끝내 우리를 찾아내므로. 그러나 한 번도 우리의 시간이 아니었으므로. 우리는 영원히 기원으로부터 추방된 채 과거의 바깥이자 미래의 바깥에, 나를 존재하게 한 부모의 바깥에, 나를 키워 준 고향과 친구들과 학교의 바깥에 있다.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마침내 나는 나의 바깥에 있다는 감각. 떠돈다는 감각. 그것으로 우리의 현전을 지탱하는지도 모른다. 그러니 우리는 진실에 속해 있지 않고 진리에 속해 있지 않으며 더더욱 사실과 제도와 규칙에 속해 있지 않다. 오히려 우리는 존재 자체로서 진실의 낙원으로부터 멀어지고 진리의 움직임으로부터 벗어나며 사실과 제도와 법률의 울타리 바깥에서 하루하루 말라 가는 굶주린 들짐승일지도 모른다. 머물지 못한다는 것. 나의 바깥에서 나를 찾아서 나의 주변을 서성이는지도 모른다. 말하자면, 그 모든 것의 기원이자 그 모든 것으로서의 기원이 있다. 아무것도 없는, 아무것도 머물지 않는, 일어난 일이 일어나지 않은, 다시 시작하는 일이 결코 시작되지 않는, 아무도 자신이지 못하고 누구도 타자이지 못하며 사랑과 미움이 혼동되고 삶과 죽음이 엇갈리며 너와 내가 갈리지 않는, 가장 어둡고 깊고 위험하며 오로지 상실만이 무성한 곳. 상실로서만 확인되고 결정되며 상실을 통해서만 접근되는 곳. 우리를 영원히 상실한 자로 만드는 것. 우리를 매 순간 상실된 자로 만드는 것. 그래서 기원 앞에 설 때마다 우리는 상실의 증거가 될 수밖에 없다. 세계의 모든 질문을 안고 침몰한 곳에 기원이 있기 때문이다. 파문과 파도와 파장으로 기록되는 무늬. 무늬를 밀고 가는 저녁 공기와 그것을 완성하는 밤의 지문으로 가득한 곳. 그곳이 기원이기 때문이다. 2. 첫 시집 『죽음에 이르는 계절』(천년의시작, 20
작성일 2025-05-01 작성자 관리자 댓글수 0상세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