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틴10대 감성쟁이
감상&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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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 [공지]'감상&비평'에는 형식을 갖춘 비평문만 올려야하나요?작성일 2023-07-25 작성자 관리자 좋아요 0 댓글수 0 조회수 3032상세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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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상&비평 호접지몽 세계: 텍스트와 이미지의 (불)가능성
x=x 칠판에 수식이 쓰여있다. 이 기호식(혹은 방정식)을 마주하게 되면 이것이 품고 있는 부당성을 먼저 생각하게 된다. 특히 위 방정식에서 두 개의 기호 ‘x’를 매개하고 있는 등호(=)는 일종의 ‘같다(same as)’의 형용사처럼 사용되곤 하는데, 우선적으로 칠판에 쓰여진 ‘x’가 뒤 따라오는 x와 동일한 기호인지 의문이 든다. 물론 기호로서 ‘x’는 ‘x’ 일 것이다. 그러나 ‘칠판에 그려진 피상적인 기호’로서도 동일할까? 두 ‘x’는 비슷한 형태를 지니고 있지만, 칠판 위에서 세밀하게 살펴본다면 둘 중 다른 한쪽의 선이 더 길거나 짧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곳에서 접근법에 따라 언제든 변환될 수 있는 기호의 ‘가변적 성질’을 감지하게 된다.문학의 미술성텍스트(기호)에 새롭게 접근하려는 시도는 오래전부터 논의되어 왔다. 특히 말라르메와 블랑쇼, 그리고 바르트의 작업들은 텍스트에 ‘정신성(mental)’이라는 유령을 덮어씌움으로써, 기호의 본질을 들여다보도록 만든 성공적인 사례를 보여주었다. 반대로, 텍스트를 이미지로 받아들이려는 시도 역시 있었다. 편의를 위해 이 시도를 ‘텍스트-이미지’라 부르도록 하자. ‘텍스트-이미지’는 (내가 방정식을 부정했던 것과 같은 방식으로) 텍스트의 피성성을 중심으로 시도되어 왔다. 이 접근법으로 시도된 작품 중에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것은 이상의 일 것이다.이상 숫자와 기호들이 열을 이루고 있다. 이 작품을 처음 마주하게 되면 이상하게 텍스트 보다 ‘정사각형’이라는 이미지, 또는 측면에 위치한 화살표 그림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도대체 왜?시간이 지나면 숫자와 기호들 역시 점차 시야에 들어온다. 하지만 숫자와 기호에 대한 그 어떤 서술도 부가적으로 쓰여 있지 않기 때문에, 위 작품만 보고서 텍스트가 지니고 있는 뜻을 발견하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이곳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들을 마주한다. “여기서 사용되고 있는 숫자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숫자인가?”, “기호는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기호가 맞을까?’ 이런 질문들을 거치게 되면 사실상 이 작품이 텍스트에 대한 기준을 자가의심을 통해 파괴하고 있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심지어는, 그림과 그림 사이에 놓인 한자마저 우리가 알고 있는 한자가 맞는지 의문에 들게 한다. 이곳에서 텍스트는 ‘기의’로서 공용성(共用性)을 상실한다. 요컨대 로만 제이콥슨(Роман Якобсон)은 “공용성을 상실한 기호는 ‘기표’ (또는 이미지)가 된다”고 말한 바 있다. 기의(記意)가 ‘읽는 것’이라면, 기표(記標)는 ‘보는 것’이다. ‘보(이)는 것 (see)’과 ‘읽(히)는 것(read)’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보는 것이 인지(recognization)의 영역이라면, 읽는 것은 ‘이해(understand)’의 영역이다. 인지의 경우는 즉각적으로 감지되는 ‘감각’의 영역인 반면, 이해는 특정한 상황과 사건을 받아들이기 위해 시간과 논리를 함유한 ‘지성’을 필요로 한다. 특히 문학 - 처럼 텍스트가 보편적으로 기의로 받아들여지는 상황 - 의 경우는
작성일 2025-10-02 작성자 화자 좋아요 0 댓글수 0 조회수 47상세보기 -
감상&비평 시에서 등장하는 장르적 요소 분석
시에서 등장하는 장르적 요소 분석-변혜지, ‘멸망한 세계에서 살아남는 법’과 서호준 ‘소규모 팬클럽, 엔터 더 드래곤’을 중심으로 목차 1. 서론 2. 본론 1) 변혜지, ‘멸망한 세계에서 살아남는 법’ 2) 서호준, ‘소규모 팬클럽’과 ‘엔터 더 드래곤’ 3. 결론 4. 참고문헌 1. 서론 최근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을 넘어 시에 장르적 요소를 도입하는 경향이 뚜렷해지고 있다. 변혜지 시인의 『멸망한 세계에서 살아남는 법』, 김누누 시인의 『착각물』, 서호준 시인의 『엔터 더 드래곤』 등은 게임이나 장르문학에서 영향을 받은 작품들로, 점차 문학계에서 주목받고 있다. 어떤 이들은 이러한 경향을 단지 모더니즘의 연장선으로 해석하기도 하지만, 본고에서는 시대적 흐름 외의 다양한 요인들로 인해 발생한 장르적 특성에 주목하고자 한다. 나아가 이러한 장르성이 시에서 어떻게 구체적으로 발현되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2. 본론 1) 변혜지, ‘멸망한 세계에서 살아남는 법’ 『멸망한 세계에서 살아남는 법』(문학과지성사)은 변혜지 시인의 첫 시집으로, 제목은 웹소설 『전지적 독자 시점』의 "멸망한 세계에서 살아남는 세 가지 방법"(줄여서 ‘멸살법’)과 유사하다. 저자는 한 인터뷰에서 제목에 대해 합의된 차용이며 표절은 아니라고 밝히며, 시집의 내용과는 무관하다고 설명하였다. 그러나 제목 자체가 특정 장르를 환기시키는 역할을 하며, 이는 시집의 정체성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 다행이야, 정말.네가 아니라 나라서. 온몸이 박살 난 채 나와 동갑인 여자애는 웃고 있다. 내장과 뼈를 질질 흘리며 그 애는 세계를 위한 싸움을 이어 나간다. 저 여자애는 세계로부터 무엇도 받지 못했다.전부 내 잘못이야. 그 애에게 힘을 준 것은 내 잘못이 야. 나는 몰랐어. 이럴 줄 몰랐어⋯⋯ 여자애의 아버지는 여자애의 이름을 부르며 마구 웃어젖힌다. 모르는 사람들이 잘못한 사람을 껴안고 있다. 모두가 나와 동갑인 여자애를 쳐다보았고 이렇게 많은 장면이 지나가는 동안에도여자애의 내장은 쏟아지고 있다. 초능력을 쓸 줄 아는 손들이 움직이고 있다. 다치지 마. 이제 제발 너를 위해서 살아. 만화책 속의 여자애에게 들려주려고 나는 고함을 지른다. 죄 없는 사람들이 다치는 모습이 더 많은 사람들을 울리고 있다. 너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말하려 했고 으으응⋯⋯ 으으응⋯⋯ 보일러실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그러지 말라고 나를 달랬다. 세카이계 만화/ 변혜지 * 대표적인 시로는 『세카이계 만화』가 있다. 이 시는 일본 애니메이션이나 라이트노벨에서 자주 등장하는 세카이계(Sekai-kei)의 전형을 따라가며, 주인공 개인의 감정과 세계의 운명이 직결되는 구조를 담고 있다. 시 속에서는 "내장과 뼈를 질질 흘리며 싸우는 여자아이", "초능력을 쓰는 손들", "보일러실에서 들려오는 소리" 등 SF적이고 과장된 이미지들이 사용된다. 이러한 몽타주적 표현 기법은 장면을 빠르게 전환하며 독자에게 강한 시각적 인상을 남긴다. 장르 문학적 요소들이 모더니즘적 감수성
작성일 2025-10-01 작성자 한 휘 좋아요 0 댓글수 0 조회수 57상세보기 -
감상&비평 산소
깊은 산골 새하얀 이불 덮고 누워계신 젊은 노인 파리한 황태 한마리, 식은 전 삼키고 다시 드러눕는다 술 한모금 머리 위에 적시고 다시 외로워진다 뭐가 그리 급했냐는 할매의 말에 대답도 안하고 철 없는 소년의 눈을 뜨겁고 가득히 매운다 젊은 노인, 소년과는 생면부지인데도 나 왜 그리도 갈망하랴 옆엔 하냥 없었는데두고 간 따스한 기운은 무엇이고 참, 답답하다
작성일 2025-09-29 작성자 굿보이b 좋아요 0 댓글수 0 조회수 47상세보기 -
감상&비평 같은 캐치볼에서 다른 궤적 만들기
가끔씩 시를 쓸 때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쓴 제목이 정말 누구와도 겹치지 않을까? 며칠 전 그 궁금증을 타파할 수 있었다. 그때 난 안희연 시인의 과 황인찬 시인의 를 읽고 있었다. 각 시집에서 이라는 제목의 시가 각각 있었다. 같은 제목이지만 내용은 다르게 쓰여있었다. 당연한 소리지만 말하고 싶었다. 사람마다 각자의 세계가 생기고 구축하고 그게 자신을 표현하는 수단이 되고, 오로지 자신이 되니까. 평소 시를 읽거나 쓰는 것에 대해 흥미를 느끼지만 최근 들어 ‘시란 뭘까?’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헤집었다. 이 시들은 그런 생각을 조금이나마 잊히게 해줬다. 시를 잘 모르거나 조금은 어렵다고 느끼는 사람들에게도 쉽게 접할 수 있다. 많고 많은 시 중에 이 시들을 고른 이유.사소한 궁금증에서 시작되어 이런 흥미를 발견하고 또 같은 제목으로 쓰여 다른 내용인 시를 각각 분석해보면 어떨까?라고 느낀 종착점. 평소 캐치볼하면 ‘주고 받는다’, ‘손에 꽉 잡힌다’라는 특징이 떠오른다. 과연 이 시도 그런 내용만 가득할까?라는 생각은 금물이다. 또한, 여기서 보여주고 싶은 건 각 시인의 시를 분석하고 이들의 시 세계와 마인드를 엮어 나타내기.자, 이제 한 번 캐치볼을 던져보자! 캐치볼 / 안희연 예고도 없이 날아들었다불타는 공이었다되돌려 보내려면 마음의 출처를 알아야 하는데어디에도 투수는 보이지 않고언제부터 내 손엔 글러브가 끼워져 있었을까벗을 수 없어 몸이 되어버린 것들을 생각한다알 수 없겠지, 이 모든 순서와 이유들망치를 들고 있으면 모든 것이 못으로 보이는 법이니까나에게 다정해지려는 노력을 멈춘 적 없었음에도언제나 폐허가 되어야만 거기 집이 있었음을 알았다그래서 왔을 것이다불행을 막기 위해 더 큰 불행을 불러내는 주술사처럼뭐든 미리 불태우려고내가 받으며 노는 시간그래도 가끔은지평선의 고독을 이해할 수 있다불타는 공이 도착했다는 것은불에 탈 무언가가 남아 있다는 뜻이다나는 글러브를 단단히 조인다-> 이 시는 화자가 예고없이 날아든 공을 받는 상황이다. 처음엔 공에 대한 당황스러움이 더 커보인다. 전개될수록 이 모든 걸 받아들이고 다시 날아오는 것에 대한 준비를 마친다. 캐치볼은 순식간에 날아오는 특성이 있다. 단순히 불타는 공은 공 그자체가 아닌 예고 없이 우리에게 오는 시련과 고난을 의미한다. 모두 그런 경험 한 번 즈음은 있을 것이다. 갑자기 무기력해진 날, ‘인생노잼시기’, 우산이 없는데 소나기가 내림 etc. 이런 시기가 오지 않았으면 하는 생각이 있지만 인생은 원하는 대로 되지 않는다. 하지만 이런 말이 있다.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 이렇게 생각하면 조금은 기분이 나아진다. 시인을 화자가 대신해 이 시로 알려주고 싶은 건 ‘고난과 시련에 대한 의지하는 법’이다. 처음엔 마음의 출처도 몰랐지만 나중엔 또 다른 불행을 일부러 부르고, 고독을 이해하게 된다. 마지막엔 그들을 상대할 의지를 다잡는 행위인 ‘글러브 단단하게 조이기’. 요즘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꼭 필요한 시와 자세 아닐까. 또한, 캐치볼 이외에도 안희연의 시에선 단단한 의지
작성일 2025-09-28 작성자 yerbi 좋아요 0 댓글수 0 조회수 100상세보기 -
감상&비평 독일 사회-나치 독일과 68혁명-와 종교-가톨릭,루터교,무신론-그리고 페미니즘 서사를 통해 바라본 서스페리아(2018)
다리오 아르젠토(서스페리아-1977년도作, 원작 감독) 감독의 영화는 강렬한 미장센, 가장 이탈리아적인 이해, 구도로 대표된다고 볼 수 있다. 이는 서스페리아(1977)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데, 깊은 철학적 메세지나 상징적 요소 등을 사용하지 않고, 강렬한 서사적 공포만을 조성하며 이야기가 전개된다. 독일의 한 유명 무용 극단에 입학한 ‘수지 배니언’ 기이한 경험을 지속적으로 반복하게 되고, 무용단 내부에선 끊임없는 살인사건 등이 일어나게 된다는 하나의 틀 안에서 후반부, 끝내 무용단은 마녀 집회, 마녀 소굴이라는 사실이 밝혀지게된다. 화려한 색감의 세트와 음악을 동시 다발적으로 사용하여 롱테이크와 딥 포커스로 피사체를 포착하는 과정에서 오싹한 컬쳐 호러의 정수를 보여주게 된다. 미장센을 반복하여 절정에 다다를 때, 수지는 단순히 마녀 수장의 그림자를 발견하고 이를 가위로 찔러 살해한다. 허무하게 마녀는 살해당하면서 이야기가 결말에 이르지만, 살해되는 그 장면의 색감을 극단적으로 강렬하게 내세워 그의 초기작부터 고수해온 강렬한 살해 씬(scene)을 보여주고, 화재 속으로 사라지는 무용단과, 살아남아 탈출하는 수지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으로 이야기는 끝이난다. 즉, 허무한 엔딩이 될 수 있는 대신, 미장센을 적극 활용한 연출과 강렬한 고어적 살해장면으로 그의 호러 무비, 컬쳐 호러 요소를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를 기반으로 원작을 평한다면, 스토리에 덜 의존하는 체험 위주의 컬쳐 호러(오컬트) 무비 정도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허나 오늘 이야기할 루카 구아다니노의 리메이크 作인 서스페리아(2018)은 완전히 다릍 형식과 내용을 띤다. 루카 구아다노 감독의 특징은 통상적으로 금기되어 온 ‘사랑’ 이야기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는 것이다. 그의 대표작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에서는 보수적인 가톨릭 국가인 이탈리아 (거기에 아직 무솔리니의 잔재가 남아있을 시절이 배경인 이탈리아) 에서의 동성애를, [본즈 앤 올]에서는 식인을 통해 이해되고 합일되는 특수성을 띠는 사랑이야기를 전개시킨다.허나 그의 서스페리아는 ‘사랑’과는 그 어떠한 직간접적 영향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작중 나치 독일로 인해 갈라질 수 밖에 없던, 피해받는 연인의 이야기는 나오지만, 이는 금기적인 사랑이야기는 아니라는 점에서 제한다.) 이 비평문에서는 루카 구아다니노의 서스페리아를 많은 평론가들이 이전에 분석한 방식인 플롯과 미장센 등을 다루지는 않되, 독일 사회에서 이루어졌던 정치, 사회적 이슈-나치독일, 68혁명-과 종교적 이해관계 그리고 페미니즘 서사를 통한 해석을 내놓고자 한다. 1.독일 사회와 서스페리아작중 배경이 되는 분단된 독일은 나치 독일의 사과를 요구하는 젊은 세대들(청년들)과 잘못을 숨기기에만 급급한 기성세대들(기득권층)으로 나눠져있는 상태이다. 이런 상황에서 유럽 전역과 미국까지 번진 68혁명은 독일 사회 내부에서 자성의 목소리를 내게된다. 이는 무용단의 상황과도 비교할 수 있는데, ‘블랑’파로 대표되는 기성세대는, 청년들이 요구하는 바와 완전
작성일 2025-09-23 작성자 노도현 좋아요 0 댓글수 0 조회수 198상세보기 -
감상&비평 아가씨
“어? 저기요”처음 들은 목소리다아닌가 조금은 익숙한가대답을 하려 했지만무언가에 잡혀 뒤를 돌아볼 생각을 못했다그냥.내 길을 다시 걸어간다뭐, 필요하면 다시 부르겠지얼마나 걸었을까또 그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온다“아니 잠시만요!”신이 내린 결정일까아까와는 다르게 조금 가볍게 몸을 돌려 바라본다“누구세요?”그사람의 표정은 잊을수가 없다당황스러움,허탈함,슬픔너무 많은 감정이 들어가 있어서너무 많은 생각이 보여서그사람은 아무말 없이 나의 손을 잡고 어딘가로 데려간다“내 말 좀 들어 이상한데 가지 말고 쫌..!”이사람은 왜 화가 났지?나를 아나?의심을 가득 품음 채 도착한곳은 집이였다그리고 나는 그제서야 그이의 얼굴을 본다“아들..? 집에 언제 왔어?”눈물을 흘리는 그이를 보고난 또 다시 의문을 품는다
작성일 2025-09-20 작성자 박재영 좋아요 0 댓글수 1 조회수 175상세보기 -
감상&비평 '이 세계의 시작점을 어디로 잡아야 하는가?' 주장문
*이 글은 '이 세계의 시작점을 어디로 잡아야 하는가?'를 주제로 철학적 입장에서 쓴 발표문입니다.세계라 함은 물질 세계, 가능 세계, 수학적 세계 등등 수많은 세계를 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럼 세계란 무엇일까요? 세계의 정의는 앞서 제시한 세계들의 공통점에 있는데 그것은 ‘모든 존재하는 것들의 집합’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각자 존재를 정의하는 방식은 다르지만 각자 자신의 방식으로 존재하는 것들의 집합이 각각의 세계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물질 세계는 물질적인 존재들의 집합이고 가능 세계에서는 가능태로서 존재하는 것들의 집합, 수학적 세계에서는 수학적으로 존재하는 것들의 집합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 세계들은 모두 각자의 방식으로 완전한 세계처럼 보이기에 우리는 논제에서 말하는 세계가 도대체 어떤 세계를 말하는지를 헷갈려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저는 이번 시간에 이런 헷갈리는 세계들을 종합적으로 바라보고, 하나의 공통된 세계를 제시하여 그 시작점을 탐구할 생각입니다. 여러가지 세계 중에서 가장 일상적이고 다루기 쉬운 세계를 꼽으라 하면 우리는 가장 먼저 물질 세계를 떠올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물질 세계는 겉보기에 완전해 보이는 것과는 달리 실은 우리가 확신할 수 있는 것이 되지 못한 다는 것은 쉽게 입증될 수 있는데 가령 우리는 이런 경우를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갑자기 어디선가 소크라테스 같은 사람이 튀어나와서 우리에게 이렇게 묻는 것입니다. “그대가 말하는 물질 세계는 어째서 믿을만한 것이 되는가?” 그럼 우리는 물질 세계는 우리의 감각 기관에 의해 너무나 쉽고 실감나게 체험되기에 믿을 수 있는 것이라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그 이상한 사람은 또다시 묻는 것입니다. “그대의 감관은 어떻게 확신할 수 있는가?” 그럼 우린 아마 그것이 과학적으로 검증되었기 때문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럼 그가 과학적이라는 용어를 이렇게 재정의하는 것입니다. “과학적이라는 것은 감관에 의해서 체험된 사실을 말하는가?” 그럼 우린 이때 무언가 논리가 잘못됨을 느끼면서도 그의 물음에 긍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럼 그 소크라테스 같은 사람은 이렇게 우리의 대화를 요약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자네의 주장을 내가 이해한 바에 따르면 이런 거라네. ‘물질세계는 믿을만하다. 왜냐하면 감관에 의해 체험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감관이 믿을만한 이유는 감관에 의해서이다.’” 그리고 이 경우 만약 감관이 믿을만 하다면 물질 세계를 우리가 믿을 수도 있겠지만 또한 같은 이유로 감관이 믿을만 하지 않다면 물질 세계 또한 믿을만 하지 않음을 찾을 수 있지만 감관이 믿을만한 이유가 없기에 물질세계는 ‘꼭 그래야 하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이유로 다른 대부분의 세계는 가장 근본적인 부분에서 합당한 이유를 제시하지 못하고 단지 순환함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가령 수학의 경우에도 공리를 믿음으로서 시작하므로 필연적일 이유가 없고, 또 가장 쉬운 사례로 종교의 경우에도 신에 대한 믿음 위에서 세워진 것에 지나지
작성일 2025-09-14 작성자 Ted 좋아요 0 댓글수 1 조회수 249상세보기 -
감상&비평 김수영의 시 중 3편의 ‘눈’의 의미
김수영의 시 중 3편의 ‘눈’의 의미 1. 서론 김수영은 어째서『눈』(1956, 1961, 1966)이라는 제목의 시를 3편이나 썼을까? 김수영의 시 세계에서 ‘눈’이라는 소재는 어떤 의미일까? 3편의 시는 모두 제목은 갖지만, 전혀 다른 시이다. 제목과 소재는 같지만, 그 속의 내용과 시인이 하고자 하는 말은 전부 다르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따라서 필자는 김수영의 작품 세계를 정의하기에 가장 적합하다고 생각하였으며 또한 세 편을 비교하면서 김수영이 시를 쓰면서 말하고자 하는 것을 알 수 있을 거라 판단해 김수영의『눈』(1956, 1961, 1966)이 쓰인 시대와 김수영의 시 스타일과 세계의 변화를 알고자 하였다. 시대적 상황과 김수영의 시 세계 변화는 사실주의 시인으로 알려진 김수영에게 분명 필연적이고 4ㆍ19 혁명(1960)과 5ㆍ16 군사정변(1961)을 기점으로 변화하는 김수영의 시를 분석하고자 하였다 2. 본론 1) 1956년 소작「눈」 눈은 살아있다떨어진 눈은 살아있다마당 위에 떨어진 눈은 살아있다 기침을 하자젊은 시인이여 기침을 하자눈더러 보라고 마음놓고 마음놓고기침을 하자 눈은 살아있다죽음을 잊어버린 영혼과 육체를 위하여눈은 새벽이 지나도록 살아있다 기침을 하자젊은 시인이여 기침을 하자눈을 바라보며밤새도록 고인 가슴의 가래라도마음껏 뱉자 1956년 소작의 김수영의『눈』은 3편의 ‘눈’ 중 가장 유명하며 고등학교 교과서에도 실릴 정도로 압도적인 인지도를 자랑한다. 김수영의 치열한 현실 비판적 정신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작품으로 유명하다. 시 속에서는 “기침을 하자”와 “눈은 살아 있다”를 반복하고 변주시키며 작품을 진행한다. 작품에는 재밌는 지점들이 꽤 있다. “떨어진 눈은 살아 있다”라는 지점이다. 일반적으로 눈을 떠올리면 대부분 사람은 내리는 눈을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봤을 때 내리는 눈보다 “떨어진 눈”은 정적이다. 떨어진 눈의 정적인 이미지에 살아 있다고 말한 것은 당시의 시대상을 살펴봐야 한다. 1950~1960년도에는 광복 이후 무엇 하나 잘 정리되지 않는 혼란이 있었으며 은폐의 이미지를 갖고 있으며 이미 다 내린 “떨어진 눈”은 김수영의 시선에서는 그저 겉보기에 집중한 그 당시의 시대성을 반영하고 있다. 김수영은 앞서 말한 “떨어진 눈”은 살아 있고 기침하며 가래라도 뱉자고 말하고 있다. 당시의 김수영은 이미 쌓인 악습(눈) 위에 목소리를 내는 것(기침)이 당시 김수영의 시론임을 알 수 있다. 김수영의「눈」(1956)에 담긴 김수영의 시 세계를 뒷받침해주는 작품으로 김수영의「폭포」를 들 수 있다. 시「폭포」에서는 “떨어진다”와 “곧은 소리”를 반복하며「눈」의 기침을 연상시킨다. “폭포는 곧은 절벽을 무서운 기색도 없이 떨어진다/폭포는 곧은 소리를 내며 떨어진다”에서 드러난 김수영의 표현은 김수영의 시 세계를 일관적으로 만들어주고 있으며 우리는 그 속에서 김수영의 시의 전반기 모습을 볼 수 있다. 2) 1961년 소작 「눈」 요 시인 /이제 저항시는 /방해로소이다이제 영원히 /저항시는 /방해
작성일 2025-09-13 작성자 한 휘 좋아요 0 댓글수 1 조회수 306상세보기 -
감상&비평 알 지 못하는 울음에 관하여 -청소년 과대대표의 관점에서- Op.70
왜, 하필 백은별인가? 왜 백은별이냔 말이다. 오래전에 비청소년이 되어버린 청소년이나 비청소년성을 겪어보지 못한 청소년이나, 사실은 어떤 영웅주의에 심취하여 이 시대의 나폴레옹이 스스로를 기성으로부터 구원해주기를 오래도록 고대하였다. 그것은 아주 추상적이고 거론되어 본 적도 없어 우리는 그간 까마득히 잊고 있었으나, 창작자로서 창작물을 통한 해방, 그 해방자를 우리는 꿈꾸었고, 우리는 스스로 그 데데떼 같은 아이콘이 되고자 소망하여, 사실 다른 모든 것을 제치고 단지 그 때문에 그대는 펜을 들지 않았는가? 자 여기 있다. 세상에서 가장 나이브하고 느린 전격전의 주인공, 교복을 입은 구데리안이! 도대체 우리의 황제는 어디 가고 이 오만한 코르시카인 소설가만 남았단 말인가? 나폴레옹은 후에 자기 창작물들을 모두 거둬들여 폐기했음을 기억하라. 우리는 또 다른 압제자를, 물론 두 팔 벌리고 환영한 사람은 없겠지만은, 다시 튈르리에 들인 것이나 다름없다. 그는 라 마르세예즈를, 혹은 에반게리온을 안다. 그러나 콩코르드 다리는 한 번도 놓인 적이 없었다. 자, 이제 다시 들어가라! 원래 있었던 네 로! 다시 짝사랑하거나 연애하거나 헤어지거나 늙어버리든가 심심하면 죽이던가 자살이라도 하란 말이다! 툇, 젠장할 거.
작성일 2025-09-12 작성자 기능사 좋아요 1 댓글수 0 조회수 287상세보기 -
감상&비평 어느 단상: 시대의 흐름 속에서 바라본 당사자성
문학에서 (특히 소설의 경우) 저자가 3인칭 서술을 사용하는 것은 특별한 일이 아니다. 다만 최근 한국문학에서 3인칭 서술 사용의 빈도가 가시적일 정도로 줄어들었다는 인상을 받고는 한다. 특히 그러한 양상은 미디어 매체에 전면적으로 영향을 받고, ‘SNS’와 ‘알고리즘’이라는 자기 폐쇄적인 공간을 시대에 의해 수용하게 된 2030 ‘젊은 세대’ 작가들에게서 크게 발견되고 있다. 대표적인 이들만 간단히 호명해 보자면, ‘김병운’, ‘김멜라’, ‘김지연’, ‘이서수’, ‘서이제’, ‘손보미’ 등이 있을 것이다. 그들의 작품(들)은 대게 소설을 묘사하는 방식에서 화자를 ‘나'라는 1인칭 단수로 설정함으로써 개인적인 이야기를 자기 폐쇄적인 공간에서 진솔하게 이끌어나간다. 그 과정에서 당사자성에 대한 조심스러운 고민의 흔적들을 보여주기도 한다. 젊은 작가들이 1인칭 묘사를 애용하는 이유를 살펴보는 것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다. 휴대폰이 이제 막 세상에 등장했을 때, 그들은 학창 시절을 보내고 있었거나, 혹은 대학을 전전하고 있었다. 다시 말해, 한때 국내 문단을 주름잡았던 7080 세대들이 민주화 운동의 전선에서 사회를 마주하고 발화와 사유를 터득했던 것처럼, ‘2030’ 젊은 작가들은 휴대폰이란 자가폐쇄적/개인적 공간에서 세상을 마주했다. 그렇기에 ‘7080’ 세대 문인들이 운동권에서 세상을 배워나가며 ‘정치 문학’이라는 하나의 시대적 흐름을 만들어냈듯, 2030 세대 문인들은 (옳은 명칭은 아니겠지만) ‘개인 문학’의 흐름을 만들어내고 있던 것인지도 모른다. 1인칭 묘사는 그러한 시대적 흐름을 단편적으로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다.하지만 이 사례를 긍정적으로 (또는 무감각하게) 바라보는 것은 그다지 좋은 행동이 아닌 듯하다. 시대에 따라 뒤바뀐 양상을 검토 없이 수긍하는 것은 우리의 감각을 무디게 만들뿐더러, 체화되지 않은 것들을 내부로 끌어들일 위험을 안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묘사법처럼 독자와 작품을 매개 하는 중요한 형식은 더욱 세밀하게 검토되어야 한다. 그렇기에 이런 1인칭 묘사/서술에 대해 조금 더 많은 논의를 거칠 필요성을 느꼈다. 1인칭 묘사에 대해서는 풀리지 않는 논의가 하나 있다. 그것은 작품 속 ‘나’가 소설이라는 가상의 공간에서 구체화된 창조적 ‘인물'인지, 아니면 이면지 뒤에서 글을 쓰는 작가 ‘본인'인지에 대해서 알 길이 없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이 지점에서 ‘당사자가 아닌 사람(작가)’이 화자가 되어 당사자 행세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어쩌면 작품의 윤리를 결정적으로 판가름 지을 수도 있는 흐릿하고도 모호한 자가당착의 경계에 봉착한다. 작가가 입을 열지 않는 한 그 자가당착 앞에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근래 한국문학의 동시대적 담론이 과거에 비해 비교적 유보되어 있다는 인상이 적지 않게 드는 것 역시 당사지성에 대한 논의가 제한적인 자장 내에서 야기될 수밖에 없기 때문은 아닐까.최근에는 유명 인플루언서나 연예인들의 일상을 담아낸 콘텐츠가 대중의 유흥거리로 소비되고 있다. 연예인들은 자그마
작성일 2025-09-11 작성자 화자 좋아요 0 댓글수 1 조회수 670상세보기 -
감상&비평 우리는 어긋남을 어떻게 다루고 있는가―마중도 배웅도 없이(박준)를 읽고
조부상을 당했다.장례식장에서 책을 읽었다. 제목은 마중도 배웅도 없이.시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시집을 읽기 시작한지도 얼마 되지 않았다. 박준 시인의 전작도 읽어보지 않았다.이렇게 말하는 건 내가 쫄리기 때문이지. 필자가 이 밑으로 쓸 건 해석이 아닌 감상이다. 틀렸다고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계속해서 어긋남에 대해 말하고 있다고 생각했다.낯선 이미지들을 차용하는 것 대신에 친숙한 소재들을 활용해서 그것들 사이의 '맞지 않음'을 보여준다.그게 꼭 남겨진 사람의 넋두리처럼 보였다.죽음은 불공평하다.필자는 이번 기회에 그걸 깨달았다.그러나 거기에 대고 박준 시인은 이렇게 말한다.모든 건 원래 다 불공평하다.그래. 세상에 원해 공평한 건 없다. 누군가를 좋아하는 마음도, 미워하는 마음도 다 양쪽이 똑같을 수 없는 거다.내가 한 가벼운 실수가 누군가에게는 중범죄처럼 느껴지고 (초승과 초생參)내 믿음과 현실이 같을 수는 없고 (공터參)사람과 사람 간의 관계가 끊어지는 시점과 내가 그 사람을 끊어내는 시점이 같을 수는 없고 (마음을 미음처럼參)내가 바라보는 그 사람과 실제 그 사람은 같을 수 없고 (눈參)죽음은 사람을 기다려주지 않는다. (상參)그런 어긋남들은 종종 우리를 슬프게 한다. 울게 하고, 비통하게 하고, 화가 나게 한다.그런데도 살아야 한다.왜냐면 원래 세상은 불공평한 거니까.진실을 깨닫고 세상이 무너진 느낌을 받을 수도 있다. 그러나 세상은 안 무너진다. 원래 그렇게 생겼으니까.못 받아들여도 상관 없다. 세상은 원래 불공평하니까.그냥, 원래 그런 거다.사람은 원래 어긋난 걸 못 받아들이고, 세상은 원래 어긋나 있다.우리는 어긋남을 어떻게 대우하고 있는가.우리는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가.
작성일 2025-09-03 작성자 박하해 좋아요 0 댓글수 1 조회수 181상세보기 -
감상&비평 관계속 여백을 글로 채우며-박준 <마중도 배웅도 없이>를 읽고
박준의 시집을 보고 있으면, 서정적인 문장과 서사를 보곤 한다. 그의 대표 시집인 의 제목만 봐도, 그런 경향이 있다. 그러나, 그의 신작인 의 제목은 흥미가 가는 제목도 아니고, 서정적 이거나, 아름다운 제목도 아니다. 지극히, 평범하다. 그렇기에 그의 다른 시집과 대비할 때, 독자로써 흥미도는 떨어진다.하지만, 그런 우려에도 불구하고 책을 열어, 차례를 봤다. 위 시집은 총 4개의 소제목으로 챕터가 나누어져 있다. 1부인 , 2부인 , 3부인 , 4부인 이렇게 시들이 구성되었고, 뒤에는 그의 산문과 해설 그리고 시인의 말이 있다. 이런 구성으로 볼 때, 위 시집이 말하려고 하는 것은 시집의 제목처럼 마중과 배웅이 없는 관계를 드러내는 것으로 보인다.위 시집의 첫 세 시는 , , 이다. 위 제목들은 모두, 변화와 관련이 있다. 지각은 본래, 만나기로 약속한 시각에서 변화되게 도착한 것이고, 미아는 알고 있는 길로 들어가야 할 것을, 모르는 길로 들어가 만들어지는 것이고, 이사는 살고 있던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 이동해 사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기에 앞 세 시는 모두 변화를 예고하고 있다는 것을 알려준다.이르게 찾아오는 것은한결같이 늦은 일이 된다 中사람들에게 휩쓸려 잡고 있던 손을 놓치고 가방까지 어딘가에 흘리고 그렇게 서로를 잃어버렸을 때 中언제인가질렀어야 할 비명은사람의 말로 나누었습니다中이렇게 세 시 모두 변화가 시작되고 있다는 것을 야기하면서도 변화가 이루어졌다는 것을 보여준다.시 에서는 화자가 대놓고, 슬퍼하고, 타자에게 미안해 한다. 그렇게 행동하지만, 결국 결미에 이르면서 '이르게 찾아오는 것은 한결같이 늦은 일이라고' 자신을 자책하고 있다.왜 이르게 왔는데, 한결같이 늦었다고 표현한 것일까? 나는 이를 역설이라 본다. 이를 이용해 해석하면, 현재 화자는 약속이 있었던 게 아니다. 그는 만날 때마다 늦었던, 사람을 더 이상 보지 못하기에 생긴 자책 때문에 늦었다고 표현하고 있다. 또한 라는 시에서 역시 화자는 자신을 찾지 않고, 너를 찾는다고 했다. 미아라는 설정의 화자는 거대한 은유이며, 너를 찾는다는 말도 결국 만나지 못한 사람을 찾는 것을 뜻한다.이는 앞서 말한 것 중 후자에 힘을 실어준다.마지막으로 역시 병원과 학교라는 이미지와 눈 밑에 불길이라는 이미지를 통해, 만나야 했던 사람이 죽었거나, 더 이상 보지 못함을 간접적으로 감각적이게 표현하고 있다.위 시편들 이후 다른 시들을 보니 이해가 쉽지 않았다. 그 이유가 뭘까 생각했다. 그 결과 파편적으로 구성되었지만, 유기적으로 이어진 시집의 구성이 그랬다는 답에 도달했다.특히 3부 중 은 그의 생활을 모르는 독자로써 매우 불친절한 시다.바람이 그 집문을 엽니다다시바람이 그 집문을 닫습니다 전문여기서 그 집은 위 주소에 대한 사유일까? 그러나 시 내부에서는 건물이나 장소에 대한 서사보다 바람으로 열리고 닫히는 문의 이미지만 그리고 있다. 일반 독자에게는 위 시가 어떤 의미인지, 어떤 것인지 잘 그려지지 않는다. 나 역시 여러 번 위 시만 재독했는데도, 의미 파악은 어려
작성일 2025-08-31 작성자 송희찬 좋아요 0 댓글수 1 조회수 361상세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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