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토리 vol.246

시
문장의 시선 더보기한강의 양의성(Ambiguity)1) 후쿠시마 료타(福嶋亮大)2) 한국어 번역: 정창훈 1. 우선 한 가지 밝혀 두자면, 나는 한강의 열렬한 독자라고는 할 수 없다. 그녀가 주제화하고 있는 한국 근현대사에는 큰 관심을 갖고 있지만, 내가 그것을 깊이 이해하고 있다고는 도저히 말할 수 없으며, 한강의 서술 방식 또한 종종 암시적인 측면이 있기에 읽어 나가다 보면 구름을 잡는 듯한 느낌을 받을 때가 적지 않다. 그녀가 예리한 감각의 소유자이며 그것이 문장에 추진력을 부여하고 있다는 것은 틀림없지만, 모든 작품에서 소재나 주제에 적합한 서술 방식이 사용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의 여지가 있다. 게다가 그녀의 문학이 일본에서 수용되는 방식을 보면, 전반적으로 비판성을 결여하고 있다는 점에 위화감을 느낀다. 예를 들어, ‘시적(詩的)’이라고 일컬어지는 그녀의 문체가 구체적으로 분석되지 않고 무조건 바람직한 것으로 여겨지는 일이 그러하다. 그러한 평가를 하고 싶다면, 글쓴이가 먼저 ‘시적’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단순히 꾸밈만 있고 내용이 없는 문장과 어떻게 다른지를 책임을 갖고 확실히 검증할 필요가 있다. 솔직히 말해서, 한강을 둘러싼 일본 독서계의 분위기는 ‘아픔’이나 ‘상처’나 ‘회복’과 같은 심오해 보이지만 결국 누구나 안심하고 입에 담을 수 있는 클리셰를 동반할 뿐이며, 개별성・비판성을 결여한 채 모호한 안개처럼 퍼져 나가고 있는 듯 보인다. 그녀에 관한 일본인들의 비평은 대체로 판에 박힌 듯이 이러한 클리셰로 이뤄져 있는데, 이는 현재 일본에서 우크라이나나 팔레스타인 전쟁이 빈번히 언급되는 반면, 과거 식민 지배에 대한 언급은 거의 찾아보기 어렵다는 것과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다. 서구의 독자들이라면 그래도 괜찮을지 모른다. 그러나 일본의 독자들이 한강이 묘사하는 ‘아픔’을 그토록 쉽게 일반화해도 괜찮은 것일까? 애초에 근현대 한국의 ‘아픈 역사’의 원인은 일본의 식민지 지배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것이다. 카터 에커트의 방대한 연구에 따르면, 한국 사회에 뿌리내린 군사주의의 뿌리는 일본 육군의 사관 교육에 있었다. 군사 쿠데타를 거쳐 대통령이 된 박정희는 본래 만주국 군관학교 출신으로, 일본인 교관으로부터 규율과 가치관을 주입받은 군인이었다. 따라서 ‘개발 독재’를 기축으로 하는 그의 국가 형성 사업은 “항상 현저한 군사적 색채”를 띠었고 “경제를 포함한 모든 분야의 국가 프로젝트가 군대식으로 행해졌으며, 그 영향은 한국 사회 곳곳에까지 미쳤다”고 한다.3) 한강의 대표작 『소년이 온다』에서 다뤄진 1980년 광주 항쟁도 한국의 군사주의적 정신 풍토를 고려하지 않고 말하기 어려운 것이다. 박정희 암살 사건 이후, 전두환의 계엄령 아래 북한의 공작에 의한 치안상 위협을 구실로 삼아 일어난 이 학살에는
시쳇말: 문학이란 레퀴엠 방승호 1. 레퀴엠 2. 아직 있는 것을 위한: 예기적 애도 3. 거처가 되어 주는: 자기 삭감의 애도 4. 시체들의 말 5. 문학이란 레퀴엠 1. 레퀴엠 “Dona eis requiem” 저들에게 안식을 주소서 레퀴엠. 죽은 자를 위한 미사곡. 진혼곡(鎭魂曲)이라고도 불리는, 생의 경계를 넘어선 존재를 위한 노래들. 누군가는 이것을 두고 모차르트를 떠올리거나 주세페 베르디를 말하겠지만, 이번 작업의 초점은 레퀴엠의 현대적 흔적들을 더듬어 보는 일이다. 흔적들은 떠다닌다. 다만 우리가 찾지 않았을 뿐. 레퀴엠은 그 형태를 달리하며, 혹은 변주하며 또 다른 가면을 쓰고 우리 곁에 존재한다. 그것이 15세기에 여러 성부의 형식으로 변주되었듯이, 이 시대의 레퀴엠은 더 다양한 이미지가 되어 잔존한다. 원형이 훼손되었다고 해서 그것이 세계에 존재하지 않는가? 그렇지 않다. 죽은 이가 죽어서도 세계에 존재하듯이 원형은 몰락하였더라도 그것은 이미지가 되어 세계에 기생한다. 문학이란 이름으로 세계의 가장자리에서 도사리는, 잠재적 가능태로서 숨죽인 기표들이 여전히 존재한다. 레퀴엠은 죽은 자의 죽음을 위로하는 일뿐만 아니라 죽은 자가 여전히 우리와 함께한다고 말하는 일에도 쓰인다. “Dona eis requiem(저들에게 안식을 주소서)”. 이것은 타자를 기억하는 행위이면서 동시에 그들에게 영원한 시간을 부여하려는 주문이기도 하다. 기억과 애도는 호출과 재생을 야기한다. 응답하지 않더라도 그들을 호명하고 증언하며 기록을 거듭하는 일이 때로는 제한된 해석 바깥의 사건을 일으킨다. 상징이 이미지가 되듯 레퀴엠은 파생된다. 형식적 애도 바깥에서 주체의 출현을 예비하는 시도로서 레퀴엠은 변이된다. 들뢰즈가 말한 해석 자체를 전환시키는 해석, 다시 말해 관습 바깥의 해석을 가능케 하는 이행은 정형화된 애도에서 탈피할 때 비롯된다. 의식과 실천이 범벅되는 그 경계로부터 현대식 레퀴엠은 다시 꿈틀댄다. 문학이란 이름의 레퀴엠이 모습을 드러낸다. 죽은 자를 위한 미사곡이라는 전제를 뒤흔들면, 관행의 중력 바깥으로 무엇인가 보이기 시작한다. 아직 죽지 않은 자를 위한 형식. 자기 삭감의 형식으로 뒤틀린 채 존재하는 양태. 오히려 이러한 지점들이 레퀴엠을 작동하는 작금의 방식이랄까. 그렇다고 해서 모든 문학을 레퀴엠이라는 이름 아래 포섭하자는 말은 아니다. 타자에 대한 애도라는 명분으로 다시 정형화된 그 관습 이면의 무엇들에 주목하자는 것이다. 문학은 늘 질서 바깥의 것을 주목해 왔으며, ‘문학적인 것’은 그 양태들과 함께 뒤섞이기를 마다하지 않았다. 레퀴엠으로부터 다시 보아야 하는 것은 반드시 삶과 죽음의 경계가 아닐지라도 주체와 타자로 호명되는 그 이분적 질서 사각지대에 애도 대상이 존재해 왔다는 사실이다. 죽음으로 호명된 타자는 잠시나마 주체의 자리에 서게 되지만, 죽지 못한 존재는 타자라는 이름을 부여받지 못한 채 경계에
비평의 자리 2 최가은 1. 너는 변호인이자 시해자로서, 죽은 작가의 약점과 결점을, 네 작업에 알맞은 누추한 진실을 건져낼 수 있는 교묘한 질문들 속으로 그녀를 유인할 것이다. 너는 그 질문들 속에 죽은 작가와 함께 살았던 사반세기 동안의 시간을 반성적으로 재구성할 수 있는 은밀한 함정들을 설치하여, 그녀가 자신의 얼굴이라는 투명한 거울을 대면하도록 부추길 것이다. 죽은 작가의 아내는 네 속임수와 거짓말에 치가 떨릴 것이고, 그날 너를 집으로 들여놓은 것을 자책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너는 진실의 조각을 발설해야 할 의무가 있으며, 죽은 작가의 아내는 네게 진실의 일부를 공유한 것을 후회할 것이다. 너는 미열 같은 흥분 속에서 응답이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초인종 소리가 멎었다. 너는 다시 초인종을 눌렀다. 여전히 저택 안에서는 아무런 응답이 들리지 않았다. 대문은 완강하게 잠겨 있었다.1) 소설은 ‘죽은 작가’라는 기호 아래 결집하고 흩어지는 ‘너’의 운동으로 가득 차 있다. ‘너’는 누구인가. ‘너’는 무언가를 좇는 자. 불가해한 형태로 유폐된 어떤 진실을, 진실의 환영을, 혹은 환영을 덮치는 기억을 추격하는 자이다. 누추한 진실을 누비기 위한 거짓, 투명한 거짓을 뭉개기 위한 진실 사이를 정신없이 횡단하는 ‘너’는 그 무언가의 “변호인이자 시해자로서”, “진실의 조각을 발설해야 할 의무”를 지녔다고 주장한다. 다시, ‘너’는 누구인가. ‘죽은 작가’에 관한 단편소설을 쓰기 위해 그의 흔적을 찾는 중이라는 ‘너’는 그의 문학적 “유산”을 “냉혹하게 적출”하는 “문학적 해체”, 혹은 일종의 자기기만에 불과한 “문학의 우상을 살해하는 퍼포먼스”2)를 준비하는 자이다. “숭배”와 “모독” 사이의 간극과, 그 간극을 오가는 자의 공포를 요란하게 발설하며 초조한 기대로 가득 차 있는 자이기도 하다. ‘너’는 은밀하게 설치한 네 함정에 의해 ‘죽은 작가’와 ‘죽은 작가의 아내’가 “자신의 얼굴이라는 투명한 거울을 대면하도록 부추길” 수 있다고 믿는다. ‘죽은 작가’보다 언제나 한 발 앞선 ‘앎’과 ‘진리’를 확보한 것이 ‘너’의 자리이기 때문이다. ‘너’는 그들로부터 진실에 관한 특권적 “의무”를 지닌 그들의 미래, 다시 말해 우리의 현재이다. 곧 맞이하게 될 무력하고 무지한 과거의 몰락 앞에서 흥분한 현재는 초인종을 누른다. 한 번, 그리고 또
셀프캠 시뮬레이션; 존재하지 않는 그리움의 시작법1) -황인찬과 배시은의 시를 중심으로 신은조 1. 왜 그리움은 이 세상에 없는가 이창동의 영화 은 “나 돌아갈래!”라는 외침으로 포문을 연다. 기차가 달려오는 선로 위에서 절규하는 남자 “영호”는 어느 순간 자신의 인생이 돌이킬 수 없을 만큼 행복으로부터 멀어져 버렸으며, 가장 행복했던 순간으로부터 멀어지기를 선택한 자가 바로 자신이라는 사실을 문득 깨달은 후 미쳐 버린다. 그래서 영호의 비명은 만약 시간을 멈추고 행복했던 그 순간으로 돌아간다면 이와 같은 선택을 하지 않겠다는 의지다. 이때 앞으로만 나아가는 기차의 이미지는 역행을 불허하는 시간의 특성과 매우 흡사하며, 선로에 서서 기차를 막아서는 영호의 행동 또한 시간의 흐름을 멈춰 세우려는 의지의 표명 그 자체라고도 읽을 수 있다. 그러나 시간은 언제나 앞으로만 흘러가며, 이 장면과 함께 그의 삶은 막을 내릴 것이다. 과거는 그것이 이미 지나갔다는 사실만으로도 매혹적이다. 그래서 아름다운 고향 땅의 꿈을 꾸거나, 기행을 일삼는 사람들의 주변에 사진, 비디오, 일기와 같은 기록 매체가 놓여 있는 장면은 낯설지 않다. 지나간 사실을 그대로 “기록”하고, 독자적인 물성을 부여하는 이미지들. 시리즈와 같이 과거의 사건들을 그대로 되살려 내는, 그 자체로 노스탤지어인 매체는 대중들이 시간을 넘나들 수 있도록 권능을 행사하는 것 같다. 그런데 요즘 등장하는 미디어·매체·창작물에 드러나는 노스탤지어는 조금 다른 선로에 올라타 있는 듯하다. “베이퍼웨이브2) 음악 장르에 조악한 영상을 짜깁기해 놓은 에스테틱 영상”이 유행하는 현상과, 80년대 미국 올드스쿨 힙합 패션의 대표 격인 펑퍼짐한 바지와 브라탑을 입고 춤을 추는 톱 아이돌 가수들을 떠올려 보자. 그들의 뮤직 비디오에는 일본 도쿄 외곽의 풍경이 비추어지며, 등장하는 인물은 90년대의 전자 제품들을 사용한다. 이와 같은 이미지는 앞서 언급했던 “고향에 대한 그리움”과 동떨어져 있음은 물론, 실존하는 시대상을 재현하는 데에 총력을 기울이는 “복고”나 “레트로” 등의 키워드와도 거리가 있다. 이상한 일이라면 일련의 작품들을 감상한 대중들이 해당 영상에 공감하며 심지어는 그리워한다는 것이겠다. 이하림은 시대적, 정서적으로 동떨어진 이미지들을 매개 삼아 노스탤지어를 불러일으키는 현대 매체들의 동향을 “액체 근대(지그문트 바우만)”로 통칭되는 포스트모던 사회에서의 파편화된 기억, 그리고 그로 인해 파열된 역사성의 형상이라고 정의한다.3) 세계화와 개인주의로 인해 “집단 기억”이랄 만한 상실의 경험을 갖추지 못한 현대인의 집단적 무의식이 정체성 혼란을 불러일으키므로, 경험한 적 없는 것을 기반으로 한 ‘보철 기억’이 그 자리를 메우고
빛의 실패가 사과 한 알을 생성하는 순간 -심지아, 『로라와 로라』(민음사, 2018) 이채원 1. 유폐된 모든 것을 향해 글쎄, 라고 답하며 기존의 언어 체계를 넘어서는 새로운 목소리를 발화하는 일은 시가 늘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이긴 하지만, 시작(侍作)에 있어 고정화된 관념을 완전히 배제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기존의 언어가 초래한 대상의 고정된 내부를 새롭게 모색하려는 시도는 역설적으로 기존에 상징화된 기호와의 연결 선상 위에서 재구성될 따름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의 언어가 아직 도달하지 못한 실재를 포착하려는 일, 현존하는 이미지에 언어를 부여하고 그로부터 새로운 선언을 끌어내는 일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그렇기 때문일까. 여기, 여러 가치가 충돌하는 이 세계에서 끊임없이 무언가에 실패하고 있는 시인이 있다. 모든 풍경 앞에서 “글쎄”(「부엌의 부흥」)라고 답하며, “나는 나의 이야기를 믿지 않”(「여름 자르기」)는다고 말하는 이, 바로 심지아다. 시인은 뭔가를 선명하게 확정이나 확신하는 대신 이탤릭체의 목소리나 상반되는 개념을 배치하고, 동일한 단어를 일관되지 않은 감각으로 무한히 번복하는 행위를 끊임없이 발화하며 언어의 간극을 부러 형성하는 듯싶다. “한 땀 한 땀 꿰매진”(「풍경의 예절」) “단단한 문장”(「우리들의 테이블」)에 의도적으로 틈을 벌리는 듯한 시인의 방식은 현실에서 달성할 수 없는 언어의 자리를 확보하기 위한 의미화의 지연으로 연결되며, “언어가 잊은 것들”(「소유자」)에 대해 사유하는 시선의 토대로서 작동한다. 시의 가능성이 새롭고 낯선 목소리로 우리를 둘러싼 견고한 지반을 허무는 것이라면, 심지아는 언어의 틈새에서 불가피하게 발생할 수밖에 없는 오류와 관성에서 벗어나려는 움직임을 보이는 것이다. 가령 본고에 수록된 시에서 로라, 글쎄, 서랍, 사과와 같은 기표의 연쇄를 통해 “당신은 몇 개의 허용을 가졌습니까”(「소유자」)하고 성찰하듯 던지는 질문이 그러하다. 바로 이러한 점에 주목하여 심지아의 첫 시집 『로라와 로라』을 읽어 보기로 하자. 로라와 로라, 한 사람처럼 두 사람처럼, 다섯 사람처럼, 로라와 로라 (‧‧‧) 가장 나이며 가장 나의 것이 아닌 것처럼 가장 너이며 가장 너의 것이 아닌 것처럼 (‧‧‧) 얼굴이 비대칭으로 자라나는 로라와 로라 ―「로라와 로라」1) 부분 표제작 「로라와 로라」를 보면, 로라는 “한 사람처럼, 두 사람처럼, 다섯 사람처럼” 분열하며 증식한다. 로라는 단일한 존재가 아닌 동명이인이 되기도 하고, 혹은 이름은 다르지만 외양이 유사한 “쌍둥이”로 일컬어지기도 한다. 나아가 화자는 인간의 범주에서 벗어나 “코끼리”나 “시체”, “외계인”으로 그려지기도 하고, &ld
고통의 서열과 증언의 권리 ―고통과 쟁론 입론 마무리 박동억 1. 인간의 범주 지금까지 살펴본 것은 고통으로 향하려는 실천이 불가능에 가깝다는 사실이다. 고통은 섬이다. 고통을 겪는 이는 말할 여력을 가지기 어렵고, 듣는 자는 판이한 삶의 입장에서 고통을 오독하며, 사회제도는 고통을 줄이는 데 초점을 맞춘다. 결국 모든 존재는 자기 몫의 고통을 홀로 짊어지며, 한 존재가 끝까지 살아 낸 고통은 그의 오롯한 비밀로 남는다. 하나의 고통은 하나의 침묵 속에서 죽는다. 사실 그것은 놀라운 일은 아니다. 고통은 아주 두려운 것이기 때문이다. 당신이 겪었던 고통을 내가 겪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은 부끄럽지만 다행이다. 오히려 놀라운 것은 사람에게 고통을 이해하고자 하는 욕망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아주 예외적인 사건이 우리에게 그러한 욕망을 간절한 것으로 만든다. 어떤 참혹한 사건과 그러한 참혹을 겪고 있는 사람의 얼굴을 마주하는 것은 그 자체로 사건이다. 그것은 고통의 우주에서 우리가 이해하는 것이 그저 한 줌에 지나지 않음을 죄악으로 느끼게 한다. 수많은 애도 행위와 추모 행사, 그리고 기도는 그저 당신의 고통을 잘 이해했다는 착각을 만들어 낸 뒤 당신을 떠나보내는 일을 합리화하는 과정이 아닌지 반문하게 한다. 그리하여 시인은 쓴다. 문학은 당신이 ‘아직 여기 있다’라고 말하기 위한 형식, 이 작품의 언어가 당신이 겪는 고통 자체이기를 꿈꾸는 하나의 몽상이다. 물론 타인의 고통을 재현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또한 설령 그들의 고통을 잊어서는 안 된다고 말할 때조차 그들의 고통을 미화하고 그로부터 교훈을 얻는 데 그칠 수도 있다. 그렇지만 누군가의 환부를 드러내고 그의 고통을 향하기 위한 단초로서 문학은 하나의 탐구이다. 그런데 주디스 버틀러가 『불확실한 삶』(2004)에서 강조했던 것은, 우리가 타인의 고통을 이해해야 한다는 윤리적 소명을 간직한 상태에서도, 어떤 이들에게는 눈길조차 두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예컨대 전쟁터의 적군이나 제3세계의 국민이 그렇다. 버틀러는 미국의 저널에서 이스라엘 병사와 국민을 위한 추모란은 존재하지만, 팔레스타인 국민을 위한 추모란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비판한다. 어떠한 선량함은 더 윤리적인 지평으로 나아가지 못하도록 우리의 마음을 제약한다. 여기서 그가 제안하는 용어는 ‘애도의 서열’1)이다. 애도의 서열이란 이웃은 소중히 애도하고 타인의 죽음에는 반응하지 않는 차별의 원칙이 우리에게 내면화되어 있다는 사실을 가리킨다. 그것은 누군가의 고통으로 향하려는 우리의 의지 자체는 아름다운 것이지만 그러한 의지의 방향에 대해서는 냉철하게 반성해야 한다는 사실을 뜻한다. 허수경은 그러한 애도의 서열이야말로 그가 극복해야 하는 과제임을 자각한 시인이었다. 그는 독일에 체류 중인 한국인 학생이었고, 한국인의 시선으로든 독일인의 시선으로든 유고슬라비아, 이라크, 팔레스타인 등은 낯선 이국이었다. 허수경은 2000년대를 전후로 그러한
[문학상주작가 지원사업] 우수시설 국외연수 후기(가온도서관) 책과 일상, 문학의 문턱을 낮추다 가온도서관 송은정 2024년 문학기반시설 상주작가 지원사업을 운영하며 주기적으로 상주작가님에게 했던 말이 있다. “저희 일등하는 거 아니에요? 저희가 이번에 해외연수 갈 것 같아요.” 그럴 때마다 김병운 상주작가님은 “선생님, 김칫국 금지예요.”라는 답을 돌려주시곤 했다. 그리고 2025년 4월, 가온도서관이 최우수 시설로 선정되었다는 결과발표를 보고 연락을 드렸다. “제 말이 맞죠! 짐 쌀 준비하세요.” 그렇게 도착한 영국에서 마주한 것은 책이 대중 안으로 스며들고, 일상 속에 자리 잡은 광경이었다. 막연히 한국의 작가 생가와 같은 관광지의 형태, 대출·반납 위주의 도서관 형태가 주가 될 거라 예상했지만 현장에서 마주한 풍경은 전혀 달랐다. 어느 곳 하나 사유화된 곳이 없었다. 누구나 제한 없이 드나들 수 있는 소박하고 편안한 장소들, 그리고 그 안에 자리 잡은 ‘참여’의 요소들이 먼저 시선을 끌었다. 영국의 문학 현장은 기념이나 보존, 보관의 장소가 아니라, 접근과 참여의 장소라고 부르는 것이 걸맞았다. 2연수 일정 중 무엇보다도 기억에 남았던 것은 영국문화원 문학 담당 관계자와의 미팅 중의 말이었다. “번역이라는 언어적 장벽이 있기는 하지만, 사실 문학은 종이와 펜 그리고 컴퓨터만 있으면 어디든지 퍼져나갈 수 있다.”는 취지의 말이었다. 오케스트라나 공연처럼 큰 장비나 무대 장치가 필요하지 않다는 점에서 문학은 더 보편적이고 확산 가능한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 말은 영국 국외연수 일정 내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고 도서관 사서로서, 또 문학을 사랑하고 향유하는 사람으로서 ‘어떻게 책이 일상에 스며드는지’ 영국의 문학 향유 방식을 나름대로 따라가는데 있어서의 길잡이가 되기도 하였다. 영국 국립도서관 The British Library 영국 국립도서관에서 받은 주요한 인상은 보존과 개방의 공존이었다. 사실 어느 도서관이 이 두 가지 가치를 지키기 위해 노력하지 않겠냐마는, 현장에서 일하는 사람으로서 영국 국립도서관의 노력이 더 와닿았던 것도 사실이다. 과거 희귀·고자료 중심의 폐쇄적 운영에서 벗어나 누구나 패스를 발급받아 자료에 접근할 수 있는 체계로의 전환, 그리고 수장고 자료의 신속한 제공(신청하는 모두에게)과 디지털 제공을 병행해 이용의 시공간적 제약을 낮춘 점이 인상 깊었다. 생활권 단위의 원 마일 커뮤니티 구축을 위한 다양한 프로젝트 사업을 운영하면서 도서관을 ‘연구자를 위한 장소’에서 ‘지역 커뮤니티 거점’으로 만들기 위한 노력들도 돋보였다. 국립 단위의 도서관이 원 마일 커뮤니티를 중점 사업 중 하나로 보고 있다는 점도 놀라웠다. 국립도서관이지만 여전히 지역에 존재하는 모두를 위한 개방
[문학상주작가 지원사업] 우수시설 국외연수 후기(거마도서관) 거마북이의 모험 : 거마북이, 영국에 가다 거마도서관 김미경 모험을 시작하며 그림 1 거마도서관의 마스코트 ‘거마북이’ 안녕! 나는 거마도서관을 지키는 마스코트 ‘거마북이’야. 거마도서관이 2024 문학기반시설 상주작가 지원사업 우수기관으로 선정된 덕분에, 담당자님을 따라 꿈에 그리던 영국에 다녀오게 되었어. 2012 런던 올림픽 개막식을 보며 감탄했던 기억이 아직도 선명해. 특히 잠자리에 든 아이들에게 「피터팬」을 읽어주는 조앤 롤링과, 아이들이 동화 속 악당들로 인해 악몽을 꾸자 하늘에서 우산을 들고 날아와 물리쳐 주는 메리 포핀스로 이어지는 연출이 인상 깊었지. 영국문학과 문화가 가진 힘을 전 세계에 보여주는 것 같았어. 그런 영국에 가볼 수 있는 기회가 생기다니! 올해로 스무 살이지만 도서관에서 책만 읽다 보니 해외에 가보는 건 처음이라 가슴이 두근거렸어. '거마북이의 모험: 거마북이, 영국에 가다'! 직접 보고 느낀 이야기를 들려줄게. 첫 번째 모험. 거마북이, 날다 14시간이 넘는 긴 비행 끝에 드디어 런던 히드로 공항에 도착했어. 비행은 처음이었지만 씩씩하게 잘 해냈지. 하늘을 나는 기분을 느껴본 거북이는 아마 몇 안 될걸! 킹스크로스역 앞 숙소에 짐을 풀고, 먼저 도착한 분들과 만나 드디어 이번 연수 완전체가 될 수 있었어. 늦은 저녁 식사를 하며 내일부터의 일정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어. 모두 피곤했지만 설렘 가득한 눈빛이었지. 특히 흥흥 작가님을 만나 얼마나 반가웠는지 몰라. 흥흥 작가님은 2024년에 거마도서관 상주작가로 활동하며 우리 도서관만의 특색있고 재미있는 프로그램들을 기획하고 진행해 주셨지. 나 ‘거마북이’를 만들어 주신 것도 바로 작가님이셔. 작가님의 재치와 열정은 도서관 전체에 활기를 불어넣었고 많은 부분을 변화시켰어. 지금 돌이켜봐도 함께 했던 모든 순간이 반짝거렸지. 물론 그 때는 우리가 8월의 어느 날 저녁, 런던에서 마주 앉아 저녁을 먹게 될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지만 말이야. 두 번째 모험. 지식의 바다로의 항해 아침에 일어나 TV를 켜니 어린이 채널에서 페파피그와 패딩턴이 나왔어. 세계적으로 유명한 영국의 친구들이지. 우리 도서관에서도 자주 보이는 책의 주인공들이라 알고는 있었지만, 런던에서 이렇게 보니 새삼 그 인기를 실감할 수 있었어. 오늘 가장 먼저 찾아간 곳은 영국국립도서관이었어. 영국 대헌장, 마그나 카르타 원본,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스케치북, 셰익스피어 자필본 등 그 가치를 따질 수 없는 희귀한 자료들을 포함해서 세계에서 가장 많은 장서를 보유하고 있는 곳이지. 지식의 바다를 항해한다는 의미로 거대한 배를 형상화했다는 건물 입구에 들어서니 오픈 시간 전부터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었어. 평소에도 얼마나 사랑받는 공간인지 짐작할 수 있었지. 도서관의 위치와 접근성에 대해서도 다시 한
[문학상주작가 지원사업] 우수시설 국외연수 후기(노작홍사용문학관) 이야기에 관한 이야기 노작홍사용문학관 조온윤 “Stories are told eye to eye, mind to mind, and heart to heart.” 이번 영국 국외연수로 방문했던 에든버러의 스코티시 스토리텔링 센터에서 운영 철학으로 삼고 있는 스코틀랜드 격언이다. 연수 나흘째 날에 만난 이 말을 나는 영국에 머무르는 동안 자주 떠올렸다. 한국과 달리 의사소통이 자유롭지 못한 탓에 상대에게 손짓과 표정으로 의사를 전해야 했기 때문이다. 정말로 이야기가 눈에서 눈으로, 정신에서 정신으로,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해진다는 믿음만 있다면 영국은 물론 어느 나라에서도 어떻게든 살아볼 수 있지 않을까? 해외를 나가본 경험이 적어 모국어가 통하지 않는 낯선 시간을 보내는 와중에 이 짧은 문장 한 줄이 자꾸만 묘한 용기를 불어넣어 주곤 했다. 지난 연수를 회고하며 이 문장이 가장 먼저 떠오른 데에는 영국이니 당연하게도 영어로만 진행되는 스토리텔링 센터의 공연을 보고 ‘이야기는 그저 눈에서 눈으로, 마음에서 마음으로……’라고 스스로 다독여야 했던 때문도 있을 것이다. 공연의 내용을 전부 해득하지 못했다는 아쉬움에 자조적으로 한 말이지만, 자꾸만 강조하게 되는 이 문장에는 진실이 담겨 있다. 이날 스토리텔링 공연을 관람하고서 알게 된 건, 그 나라만의 문화에 기반한 유머와 뉘앙스가 담긴 모든 대사를 다 알아듣지는 못해도 이야기꾼이 전하려는 이야기의 얼거리를 비롯해 슬픔과 기쁨, 분노와 두려움 따위의 감정들을 고스란히 전달받을 수가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물론 그림자극과 애니메이션, 노래와 연주가 어우러졌기 때문도 있을 테지만, 무엇보다 무대에서 구연을 맡는 주연 배우, 그러니까 ‘스토리텔러’가 실감 나는 구연과 감정선으로 이야기 속 등장인물과 상황에 쉽게 이입하게끔 관객들을 끌어주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우리가 관람한 스토리텔링 공연 〈A Wolf Shall Devour the Sun〉은 한두 명의 출연자가 구술로 극을 이끌어가는 공연이었는데, 이런 형식 자체도 우리나라에서는 자주 접해보지 못한 형식이라서 내게는 유독 새롭게 느껴졌다. 여기에 연극배우와는 성격이 분명하게 다른 듯한 스토리텔러라는 역할도 굉장히 매력적이었다. 공연이 끝나고 찾아본 이날 공연의 스토리텔러는 Dougie Mackay, 노래와 연주는 Jemima Thewes라는 가수이자 작사가였다. Mackay 씨는 바이킹처럼 길고 풍성한 수염을 기르고 스코틀랜드 전통 의상인 킬트를 입고 있었는데, 마치 이야기를 손에 쥔 공처럼 갖고 놀듯이 그의 읊조리는 짧은 농담에 모두가 웃고, 격앙된 한 마디에 모두가 긴장하며 숨을 죽였다. 사람들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는 일, 스토리텔링이 이렇게 멋진 무대가 될 수 있다는 것도 흥미로웠다. 우리나라에도 물론 어린이 독자에게 동화책을 소리 내어 들려주는 동화
[문학상주작가 지원사업] 우수시설 국외연수 후기(가온도서관) 연수 일지 : 지역, 연계, 참여 가온도서관 김병운 작가 런던에서의 일정 가운데 단연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영국국립도서관(British Library)이었다. 영국을 대표하는 도서관이자 세계에서 가장 큰 도서관으로 손꼽히는 곳인 만큼 규모가 압도적이었고, 자국에서 출판되는 모든 인쇄물이 납본되는 곳답게 도서, 지도, 악보, 신문, 음반 등 매우 다채로운 형태의 자료를 보유하고 있었다. 상설 전시 를 통해 마그나 카르타 원본, 구텐베르크 성경, 셰익스피어 제1차 희곡집, 제인 오스틴 필사본, 비틀스 자필 가사 등 역사적으로 귀중한 자료를 대중에게 선보이고 있기도 했는데, 소장 가치가 높은 자료도 증명 없이 누구나 쉽게 볼 수 있게 하는 도서관의 정책적 기조가 전시에도 반영되어 있는 듯했다. 일정 관계로 아쉽게 전시는 관람하지 못했으나, 보유 자료의 활용도를 높이는 동시에 이용자의 접근성을 강화하려는 도서관의 노력은 충분히 파악할 수 있었다. 도서관의 기반 시설 역시 이용자의 입장에서 설계되었다는 느낌을 받았다. 각층마다 열람 공간을 복도까지 확장해놓은 것이 가장 먼저 눈에 띄었고, 각각의 구획마다 테이블의 형태가 모두 다른 것 또한 특별하게 다가왔다. 몰입이 필요한 사람부터 토론과 회의를 통해 의견을 나누고자 하는 사람까지 모두 포용할 수 있는 공간을 지향하는 듯했다. 건물의 층고가 높고 개방감 또한 커서 공용 공간임에도 오히려 이용자들의 프라이버시가 보장되는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했다. 도서관이 추구하는 공공성과 개별성이 서로 충돌하지 않고 조화를 이루고 있는 듯했고, 이용자로 하여금 오래 머물고 싶은 공간을 구축하기 위한 도서관 측의 깊은 고민 또한 느껴졌다. 자료를 보존하고 활용하는 공간으로서의 도서관뿐만 아니라 지적 호기심을 자극하는 창의적인 공간으로서의 도서관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되었다. 도서관 관계자들과의 네트워킹 프로그램 역시 뜻깊었다. 네트워킹은 크게 이벤트 기획 파트와 전시 기획 파트로 나뉘어졌는데, 담당자들의 업무 내용과 성과, 그리고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엿볼 수 있어 흥미로웠다. 그중에서도 내게 크게 와 닿았던 것은 커뮤니티 참여 매니저(Community Engagement Manager)인 자말 모하메드(Jamal Mohamed)의 이야기였다. 그에 따르면 원래 영국국립도서관은 지역 주민들이 자주 찾는 곳은 아니었으며, 8년여 전 이용자 실태 조사 이후 본격적으로 주민 참여형 프로그램을 개발하기 시작했다고 하는데, 집중적이고 꾸준한 노력 덕분에 실제로 인근 1마일 이내에 사는 주민들의 참여가 늘었다고 한다. 관련 사례로 그가 최근 3년간 진행했다며 소개해준 참여형 프로그램 역시 눈길을 끌었다. 18세에서 24세 사이의 청년들이 도서관의 소장품을 소재로 소셜 미디어에 어울리는 시각적 결과물을 만드는 활동이었고, 이를 통해 도서관의 가치를 널리 알리는 동시에 소속감과 애정을 높이는 기획이었다. 보다 다양한 연령층으로 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