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장웹진재미나요
시
문장의 시선-
시 이다희 - 실리카겔
실리카겔 이다희 하늘에 구멍이라도 뚫린 듯 비가 쏟아진다. 하지만 잘 생각해 보라. 하늘은 원래 구멍 그 자체이다. 구멍에 어떻게 구멍이 뚫린단 말인가. 비가 온다는 것은 기분의 문제가 아니다. 나무로 만든 악기들은 습기에 매우 약하다. 나는 케이스를 열어 조심스럽게 첼로를 꺼낸다. 굳이 당겨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악기는 퉁퉁 불어 있다. 이런 날에 제대로 소리가 날 리 없다. 남은 실리카겔 봉투를 세어 본다. 5개가 남아 있다. 나는 더 이상 실리카겔을 사 두지 않는다. 5개의 실리카겔 봉투를 다 쓰는 날에 연주를 그만둘 것이다. 아, 겨우 이런 다짐으로 연주 생활을 이어 간다. 봉투 겉표지에 있는 붉은 입술 위에 검은색의 커다란 엑스 표시가 있다. 먹지 말라는 것이겠지. 나는 조용히 붉은 입술에 내 입술을 포개어 본다. 내 입술이 더 작은 것 같아. 이 표면은 모든 것을 밀어낸다. 먹지 말라고 그저 여기에 가만히 두라고 말한다. 봉투를 흔들면 마치 작은 쌀알 굴러가는 것 같은 소리가 들린다. 조용히 잘 정리해 둔 신경줄이 이상한 곳으로 흐른다. 이 소리는 나의 어떤 것을 열고는 바로 닫는다. 일어나 따뜻한 차를 만든다. 침대에서 포트까지 25보. 차를 손에 쥐고 서성거린다. 러그의 양모가 올라와 발가락 사이를 파고든다. 이 만족감은 무엇일까. 무엇인가 해결된 기분이었다. 말이 되지 않았다. 나에게는 해결해야 할 문제가 없다. 러그 위에 둘 가구를 사야겠다. 무엇이 좋을까? 나는 식어 가는 차를 쥐고 러그 위를 빙빙 돈다. 작은 원 위에서 자유롭다고 느낀다.
작성일 2025-10-01 작성자 관리자 댓글수 0상세보기 -
시 이다희 - 키야
키야 이다희 안녕. 사랑해. 내가 키야에게 가르친 단어는 단 두 가지. 그 외에 모든 저주의 말들은 나에게서 자연스레 배운다. 외출을 할 때 나는 키야를 한참 바라보고 나온다. 안녕. 사랑해. 어디 갔어? 나쁜 년. 지옥에서 만나. 키야는 나에게 배운 두 단어에 항상 무엇인가를 얹어 준다. 나는 웃으며 혀를 찬다. 키야를 이전 주인에게 돌려주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키야는 통통 걸어가 먹이통에서 사료를 쪼아 먹는다. 우연히 시장 골목을 지나가다 노점상 옆에 있던 키야를 본 순간 나는 새장을 그대로 들고 시장 골목을 나섰다. 키야를 처음 본 순간 키야라는 이름만 생각이 났다. 주인이 키야를 키야가 아닌 다른 이름으로 부르는 순간을 나는 더 이상 견디지 못했다. 문이 완전히 닫힐 때까지 키야는 나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는다. 내가 밖으로 나갈 때 키야가 나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는다는 사실을 내가 어떻게 알고 있는가? 나 또한 키야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안녕. 사랑해. 나는 두 단어를 정말 열심히 가르쳤다. 그 외에 저주의 말들은 키야가 알아서 배웠다. 안녕. 사랑해. 어디 갔어? 나쁜 년. 지옥에서 만나. 나는 키야가 하는 말들을 모두 받아 적고 싶다. 그게 설령 지리멸렬하고 괴로울지언정. 키야는 키야. 나는 오래된 지옥을 지키는 문지기처럼 피곤하였다.
작성일 2025-10-01 작성자 관리자 댓글수 0상세보기 -
시 조우연 - 바탕색 칠하기
바탕색 칠하기 조우연 상실의 시대에는 가로등도 라일락도 그와 그녀의 키스도 짙푸른 바탕색에 있었죠 누가 선뜻 노랑을 등지고 있었겠나요 바탕색은 그런 거죠 하늘색은 영영 구름의 바탕색이고요 가파른 골목을 걸어 올라가는 남자의 바탕에는 회색을 칠해 주죠 교실 아이들이 툭하면 바탕도 칠해야 해요, 묻는 데에는 별이 뜨겁게 빛날 일과 차갑게 빛날 일이 바탕에 달려 있다는 것을 아는 탓이겠죠 내가 우는 걸 한참 보던 그녀가 던지길 바탕색을 고르는 건 너잖니, 그저 밤이 되어 하늘이 검은 거란다 그런 그녀도 나의 바탕색인 줄 알았어요 팔순이 다 되도록 내 멋대로 색칠을 해 왔네요 늦은 저녁 칙칙한 바탕을 끌고 돌아오던 그가 싫어서 그날은 빠삐용처럼 절벽 아래 나를 던져 볼까 줄무늬를 입은 나를 삼켜 버릴 듯 출렁거리는 바다가 나의 바탕 초록의 나무들을 바탕으로 검은 그늘이 눈부셔요 여러 해 내가 진해질수록 아련해지는 뒤엣것들이 보여요 바탕을 보기 위해 여직 무성한 것들을 그려 왔는지 모를 일입니다
작성일 2025-10-01 작성자 관리자 댓글수 0상세보기 -
시 조우연 - 수긍의 색은 회색
수긍의 색은 회색 조우연 아직이요, 하는 수국을 피워 보려면 그나마 색부터 배워야 한다네요 철봉에 매달린 팔을 놓아 버리는 마음을 먹어 본 아이는 자주 울던 일이 덜한다죠 새는 죄책감을 알까요 밤에 듣는 새의 말은 노래라 해 둘까요 울음이라 해 둘까요 구름은 후회를 할까요 투명해서 건너의 무엇도 숨길 수 없는 비의 색이 구름의 마음일까요 무언가 젖어야 물의 색이 보이는 것처럼 오늘 밤 비가 와서 우리 마음은 색을 가졌습니다 어두워져서 가까워지는 향기가 있고 비 그친 그 밤에 우리는 미안한 마음이 들뜨죠 이제 수국의 향을 알게 됐는데 놓아 버렸나 봐요 정작 색은 알고 싶지 않네요
작성일 2025-10-01 작성자 관리자 댓글수 0상세보기 -
시 조인호 - 페니 맨
페니 맨 -The Penny Man 노인은 길바닥의 페니를 줍지 않는다. 대신 동전을 살짝 돌려 에이브러햄 링컨의 얼굴이 하늘을 보게 한다. ―S. Donovan Mullaney 조인호 세상 모든 것은 원자로 이루어져 있다는 말은 잘못된 말이다. 세상 모든 것은 1센트 페니 동전 하나로 이루어져 있다. 50센트를 쪼개면 25센트가 되고, 그걸 다시 쪼개면 10센트가 되고, 그걸 다시 쪼개면 1센트가 되지만, 그 지점부터 1센트는 더는 쪼개지지 않는다. 어떤 강력한 힘이 1센트가 더 이상 쪼개지지 않도록 붙잡고 있기 때문이다. 그 힘을 이해하기 위해 나는 형을 떠올린다. 확실히, 형은 페니를 닮았다. 한 닢의 페니를 공중에 던지면 앞면과 뒷면이 나올 확률은 오십 퍼센트지만, 형을 공중에 던져 올린 그 남자는 동전이 어느 쪽 방향인지 알려 주지 않았다. 페니의 앞면에는 돼지 치는 남자를 닮은 사내가 새겨져 있고, 형은 늘 그 얼굴을 보며 ‘돼지 치는 개새끼’라고 불렀다. 형의 1페니는 미국에서 온 선물 자루 속에서 굴러떨어져 나왔다. 고아들을 위한 친절한 백인들이 보내 준 후원 물품 자루에서 나온 구리 동전 한 닢, 그것으로는 무엇도 살 수 없었지. 만약 형이 눈이 어두운 잡화점 노파를 1페니로 속였다면 분명 감옥에 갔을 테지만, 노파건, 사내건, 아줌마건 다들 1페니를 보면 이렇게 말하곤 했다. “얘야, 장난감 동전으로 사기 칠 생각은 꿈에도 말거라.” 페니는 형과 이별할 생각이 없는지 늘 형의 호주머니 안에 있었다. 애완 생쥐보다도 작은 1페니― 1페니로 살 수 있는 건 세상에 아무것도 없다. 미국에서 온 동전, 언어가 통하지 않는 이방인처럼― 신기했지만, 형의 1페니는 고아원의 형들, 누나들, 동생들 호주머니 속을 홈리스처럼 떠돌아다녔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페니의 가치는 점점 떨어졌고, 돌고 돌아 언제나 형의 손으로 되돌아왔다. 형은 잘 때도 페니를 잃어버릴까 봐 몸에 딱 붙이고 잠들곤 했는데, 다음 날, 언제나 형의 작은 배에는 돼지 치는 사내의 얼굴이 꾹 눌려 있었다. 어느 날, 돼지 치는 남자의 얼굴과 똑같은 사내가 고아원에 찾아와 형을 데려갔고, 형의 1페니도 그날로 사라졌다. 형이 그리워질 때면 나는 페니 동전 한 닢을 찾기 위해 교회 헌금통까지 뒤적거린 적도 있다. 형을, 찾을 수만 있다면 세상의 모든 밑바닥을 더듬을 자신도 있었다. 그게 흙이건 아스팔트건, 할리우드 스타들의 이름이 새겨진 보도블록이건 무엇이든 간에. 때론 무슬림들이 엎드려 절할 때 “아자르 씨, 혹시 바닥에 떨어진 1페니
작성일 2025-10-01 작성자 관리자 댓글수 0상세보기 -
시 조인호 - 녹색 광선
녹색 광선 조인호 형이 물 밖으로 걸어 나왔을 때 그의 몸은 너무나 투명해져 있었다 밤바다에는 달이 떴고, 녹색 광선이 형의 몸을 꿰뚫고 있었는데도 형은 아파하지 않는 듯했다 “봐라, 깨끗해졌어” 형이 말씀해 주실 때마다 형의 몸을 반으로 가르는 바다― 너머로 파도가 밀려오고는 했다 그 바다에서 고아원 아이들은 모두 다 보름달물해파리처럼 투명해졌고, 그것은 너무나 투명해서 마치 이 세상에 처음부터 없었던 아이들 같았고 그래서 나는 형들, 누나들, 동생들이 이 세상에 처음부터 없었던 것 같은― 무서운 꿈을 꿀 것만 같아서 감았던 눈을 뜨면 그 바다, 거기에 고아들이 있었다 투명해져서 너무나 투명해서 고아들은 서로를 통과해 지나다닐 수도 있었고 물방울처럼 하나가 둘로 나뉘기도 하고 둘이 하나가 되기도 했다 그 바다에서, 나는 형과 때론 하나가 되기도 했는데 그럴 때마다 밤바다에 혼자 떠 있는 기분이 들고는 했고 그 순간은 물을 무서워하던 내가 처음으로 물에 뜨는 시간이었고, 밤바다에 누운 채 형에게 몸이 안겨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바다에는 이렇게나 많은 별이 떠서 어딘가로 무섭게 흘러가고 있었고 그 해변에는 고아원의 여전도사가 함께 있어 그녀는 고아들에게 세례를 주고 계셨다 바다로, 그녀가 먼저 걸어 들어가고, 그녀를 따라 고아들이 형들, 누나들, 동생들이 따라 걸어 들어갔고 나도 따라 걸어 들어갔고 고아들을 반으로 가르는 바다― 수면 위로 창처럼 내려꽂히는 달빛, 녹색 광선 그 바다에서, 아이들이 나올 때는 몸은 투명해져 있어서 너무나 투명해져서 형들에게는 검은 미역이 누나들에게는 이름 모를 물고기가 동생들에게는 불가사리가 담겨 나오고 그 바다에서, 나는 세례를 받았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담겨, 올려다본 수면 위로 일렁이는 고아들의 얼굴들 눈과 코와 입이 물고기처럼 지느러미를 흔들고 “숨 쉬어” 물속에서도 숨을, 쉴 수가 있다는 걸 그때 알았다 바다 가까운 곳― 폐교에서 보낸 고아들의 여름 교실 마룻바닥 백여 명이 족히 넘는 고아들이 잠들어 있고 한밤중 형은 밤바다로 걸어 나가시고 나는 그 발자국을 따라 걸어간다 밤의 바다 앞에서― 우리 둘은 그렇게 녹색 광선을 바라보고 있었다 수면 위로 여전히 창처럼 꽂히는 녹색 광선 그 창은 점점 많아져 바다 위 묘비들이 점점 많아져 그 밤바다, 속으로 형은 걸어 들어가시고 다시 해변으로 걸어 나왔을 때 형은 다시 태어난 사람 같았고
작성일 2025-10-01 작성자 관리자 댓글수 0상세보기 -
시 하혜희 - 이 어둠 6
이 어둠 6 하혜희 제삼 계절의 광증, 제사 계절의 광증, 제오 계절 제육 제칠 계절의, 으스러지는 계절마다의 새로운 병명들, 느낌을 일깨우고 아무것도 가져가지 않는, 주기만 하고 절대 받지 않는 하늘이, 우리를 만든 자연의 전파와 우리가 만든 전파의 자연이, 우리를 사랑하지 않기로 했음이 이제는 전해지고 동전은 외상으로 글자는 공중으로, 기쁨은 살 속으로, 날을 숨기고 나갔던 산책에서 짐승들 돌아오면, 눈물들이 나무둥치를 껴안고 있었다 하며 옷을 갈아입는데, 가지마다는 옛날이 피어나고 있었다 하는데, 인간은 이제 그만! 발아래 머리 위에 우리는 너무 많이 쌓였다. 남아도는 피돌기로 손발 아리고 불 꺼지듯 안다. 만사가 새끼를 책임지지 않는다, 새끼가 만사를 책임지려는 것이고, 열기 반납한 아스팔트에 기어 보는 우리의 양친, 긁힌 길이 희게 일어나 평행으로 가리키는, 고향 없이도 향수 젖은 병사들의 머리 터진다. 더운 전쟁이 길고 축축한 후퇴는 더 길다. 우리가 사랑해야 함이 이제는 전해지고, 일렁이는 철편에 속속 불꽃, 불나지 않는 여기서, 불타지 않는 여기서, 간교한 광증이, 축척을 벗어난 시간과 함께, 그 언제도 우리의 목적을 드러낸 적 없다는 데서, 방아쇠를 당기고 잇따라 숨을 삼키는데 물 위에 떠오른 아득한 무늬 모두가 공모하여 찢어질 리 없는 것을 찢기 위해 가장 깊은 골짜기의 시내까지 핥는 것은, 나뭇잎의 서툰 비유를 비웃으며 검댕으로 만드는 것은, 관들을 끼고 돌던 지하의 물길로 번져 나가는 것은, 학살자들, 다른 말을 동시에 하는, 우리를 심판하려는, 예, 아니오! 어떻게 할까요, 어떻게 할까? 이렇게 하자, 폭풍에 달려 나가는 듯이 끄집어내기를, 핏덩이를 쥐어 으깨고 이빨 구멍에서 말 뽑아내기를, 수풀을 달라, 뿌리를 달라, 자신과 맞서라고? 그것을 원할 때에, 만들어 달라, 명령을 듣기만 하는 우리를, 우리를 따르기만 하는 너희를, 그것이 자기를 깨우는 줄은 알고 있으면서, 부서질 것들만 건드려 이 모양이 되어 있는 다시 빗속에, 그토록 무서웠던 지난밤도 흩어진다, 보라 대적자를, 등에 잿더미를 지고 너로부터 일어나 구정물 흘리는 더한 어둠 앞에 어둠이 엎드린다. 엎드려 발목을 잡아챈다. 덜한 어둠이 더한 어둠을 거꾸로 든다. 계절은 하룻밤에 바뀐다. 망해 버린 그날의 밤들은 억 수십에 걸쳐 겹쳐 있다. 옛것이 거느렸던 단어들 일제히 자세를 바꾸고, 위험한 시기 지나면 더 위험한 통치가 왔다. 돌아앉아 일제히 우좌로 고개를 흔드는, 너희는 아무것도 안 했지, 이렇게 되도록 아무것도. 죽을 이는 죽었고 아닌 이도 죽었지. 우린 망설일 대로 망설였다. 그만둬야 할 때 그만두면서! 소리를 질러도 속수무책으로 가로놓인 자신 앞에서 혜희는 거닌다. 이 방을 떠나야 한다. 내가 돌아올 날을 기다릴 필요 없다. 나는 돌아올 때에 돌아온다. 너는 아직 말하는 법을 모른다. 너는 용서해 달라고 빌면서 무릎으로 퇴장해야 한다. 네 때가 올 날을 기다려야 한다. 혜희는 혜희의 손을 쥔다. 그러나 그 전에 말하
작성일 2025-10-01 작성자 관리자 댓글수 0상세보기 -
시 하혜희 - 별의 파티 16
별의 파티 16 하혜희 개 거인들이 많은 손들로 인간들을 쓰다듬는 꿈이 나를 그곳에서 벗겨 냈다 내가 오늘의 인간을 만드는 데 기여한 것이 사실이라면 인간은 내일의 거인을 만드는 데 기여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이제 드리우기를 그들은 전기이고 빛이다, 신들의 그림자가 우르릉댄다, 말로 된 무논 위로, 그들은 열을 맞춰 인간들을 꽂아 심으려 한다, 바보는 먼바다에서 기후처럼 일어서는데, 해일로 그 경지를 덮치려고다 로봇 죽을 때까지 싸우자는 세상에서 싸우지 않으려고 죽은 내가 이곳에서 영문 모르게 앉았다가 터졌다가, 이 저승 풍경 속에서 또 죽어 놓인 나를 비정한 별 하늘이 읽으려는 것과 같이 기계의 말을 배우겠다며 절지동물들은 모래 속에서 기어 나옵니다 무슨 디움이니 리움이니 하는 것들을 나의 기억으로부터 집게발로 고르는데, 우리의 문법은 다른 층계에 있다고 일러 주려 해도 그들에게 닿지 않고 간지러울 따름입니다 유령 여러 사람이 되려고 하는 여러 사람이 되려고 하는 심중에 한 사람뿐 살갗에 한 사람뿐, 신은 우릴 놓고 도박했다가 서럽게 울고 있다 거지꼴로, 눈만 번쩍이면서 앉아 있다 저 구석에서 위안받고자 임금이 한 나의 멱살을 잡아 일으키고 그들이 엉거주춤 바다 위에 서나니, 찢어서 떼어 놓은 반죽 같은 것아, 끓고 있는 것아, 낳는다는 것을 어떤 일로 생각했느냐, 접을 수 있다 생각했느냐 펼 수 있다 생각했느냐, 무정한 윤슬 위에서 누구의 말인지 분간할 수 없고, 임금의 몸 위로 기대는 한 나의 음성이 마지막인 듯이 물결친다 바보 낳아야 하는 곳이 아니고 죽여야 하는 이곳이라면 우리는 이곳에게 물어야 한다 턱밑에 망치를 대고 죽을지 살지를 내가 이곳이냐? 아니다 우리가 원해서 이렇게 됐다고들 하지? 우리는 원하지 않는다 우리는 원하지 않는다 네가 이곳이냐? 아니다 우리가 다 무엇이냐고 했지? 이것이 우리다 이것이 우리는 원한다 우리는 벌을 원한다 그다음에 벌을 원한다 그리고 벌을 원한다 무엇이 잘못되었느냐 용서할 자유 없는 이곳이, 우리에게 오물로 쏟아붓는 자유가 잘못되었다 우리는 원하지 않는다 우리는 이것을 원하지 않는다.
작성일 2025-10-01 작성자 관리자 댓글수 0상세보기 -
시 이솔 - 달력은 유독 생일이 많은 달을 기억한다
달력은 유독 생일이 많은 달을 기억한다 이솔 골똘한 내가 각성하는 지점들에 서 있는 모습을 본다 가로수의 간격과 도시의 미관을 관련지으면서 터널에 진입하는 사랑하는 것들에게 무관심하려고 애써 본다 매일 소량의 신선한 피가 내 몸 속 곳곳에 공급되고 있다는 것이 새삼 놀랍다고 여기면서 환절기에 예민한 어른들은 제각각 나무를 하나씩 껴안고 있다 이게 맞는 길이라고 지적하고 싶은 마음을 참으면서 뭐 하나 피워 냈다고 안도한다 비행기의 꼬리가 열심히 노를 젓는 모습을 올려다보면 역시나 꽃은 한 송이가 화면을 가득 채울 때의 느낌이 훨씬 좋고 육안의 세계를 벗어나는 기분이란 잎사귀의 윤곽이 풍만해져 다가오는 거리에서 매몰차게 가열되는 수증기는 나를 압박하고 압력을 견디지 못해 눈이 자주 시큰거리고 이 날씨에도 긴 옷을 입는구나 하면서, 초심을 걱정하지 않는 자세들이 진열장에 나란히 서 있다 가만히 서 있어도 어디선가 프로펠러 도는 소리가 계속 들리고 방심하는 순간 엉금엉금 몸을 타고 기어 올라오는 것들이 심장을 콱 물었으면 아이들을 보면 새로운 형식의 옷을 입은 뛰어다니는 아이들을 보면 예나 지금이나 나는 나 같은 아이들의 미움을 받고 있는 것이다
작성일 2025-10-01 작성자 관리자 댓글수 0상세보기 -
시 이솔 - 문을 열고 들어오는 사람의 얼굴에는 사건이 없다
문을 열고 들어오는 사람의 얼굴에는 사건이 없다 이솔 나는 옥상 위에 숨어 있었다 당신이 나체를 빨랫줄에 거는 것을 본다 납작 엎드린다 당신의 머리가 바닥에 떨어지는 것을 보기 위해서 함부로 웃는 얼굴은 낮은 곳으로 가까워져야 한다 어떤 지상에서는 아이가 딸기를 먹어 대며 꼭지를 아무렇게나 뱉어 댄다 부모의 젖은 이름을 부르듯이 숨을 쉴 때마다 무릎이 땅에 박힌다 복부 쪽으로 몰리며 가라앉는 정서들 당신은 문을 열어젖히고 들어온다 당신의 기원은 어느 높이에 있을까 아이의 기도를 확보하고 울음이 터지는 순간 나는 단단하게 멍이 든다 누구든 와서 이것을 핥을 생각을 하면 벅차오른다 당신이 들이닥치고 저녁은 사건이 없이도 붉게 물든다 당신이 나를 높이 매다는 것을 본다
작성일 2025-10-01 작성자 관리자 댓글수 0상세보기 -
시 이언 - 입의 가장자리
입의 가장자리 이언 하루 종일 어떤 멜로디가 입에서 맴도는 날이 있지 그런 날엔 알록달록한 알사탕을 혀 밑으로 굴려 봐 혀끝에서 녹아 사라지는 말들 꼬마야 꼬마야 줄을 넘어라 어느 흐린 날의 줄넘기 놀이 닦지 않은 유리창처럼 방충망에 걸린 거미줄처럼 입 밖으로 흘러나오지 못하고 구연부에서 맴도는 노래가 있어 후렴구에서 자꾸 걸려 넘어지는 그런 말들이 있어 하루 종일 어떤 멜로디가 따라와 꼼짝 못 하게 하는 그런 날엔 가끔은 덜 녹은 가사 조각에 혀를 베일 수도 있지만 허밍 허밍, 이런 날에는 알록달록 알사탕을 한입 가득 넣고 굴리는 일만 생각해
작성일 2025-10-01 작성자 관리자 댓글수 0상세보기 -
시 이언 - ♨를 아시나요
♨를 아시나요 이언 세상 어디에나 하나쯤 있는 삼양목욕탕입니다. 삼양목욕탕에는 바다로 이어지는 수로가 있어요. 수로를 통해 바닷물이 들어올 때 바닷속 ♨들이 처음 역류했다고 해요. 어느 날, 삼양목욕탕 42℃ 열탕 속으로 바닷물이 차올라 ♨들이 밀려들었을 때였어요. ♨의 이름은 미끄러져 흘러갔어요. 자세히 보면 ♨의 바닥이 뚫려 있어요. 네, 맞아요. 바로 흘수선처럼 보이는 ♨의 아랫부분 말이죠. 해일이 일어나 파도가 치면 해안 절벽까지 ♨들이 튀어 오르기도 하지요. 가끔은 습식 사우나 바닥에 닻을 내려 정박하기도 하고, 그물에 걸린 ♨들이 탈의실 옷장에서 발견되기도 합니다. 밤이 되어 삼양목욕탕 굴뚝 위로 ♨가 등대처럼 불을 밝히면 육지로 몰려든 ♨들이 부표처럼 떠다니기도 하지요. 오늘따라 ♨는 미역 줄기처럼 유난히 더 미끄럽군요. ♨의 정체는 어쩌면 배수구 속으로 빠져나가는 푸른 물소리였는지도 모릅니다.
작성일 2025-10-01 작성자 관리자 댓글수 0상세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