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틴10대 감성쟁이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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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 [공지]한 편당 작품 최대 분량은 어느 정도인가요?작성일 2023-11-03 작성자 관리자 좋아요 0 댓글수 0 조회수 3642상세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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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플로리안 비르츠 이야기
아무래도 뭔가가 잘못 됐다. 나는 이 상황이 잘못 되었다고 확실하게, 확신한다. 니미럴, 언제가 시작이었더라. 기억을 더듬는다. 내 본명은 플로리안 비르츠다. 그랬다. 난 2003년 늦봄에 베스트팔렌주에서 태어나 쭈-욱, 쾰른에서 자랐다. 집안은 썩 화목했다고 볼 수 있겠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독일 최고의 금실을 자랑하는(스스로)부부였고(물론 재혼이었지만)나의 위로 형과 누나들이 총 9명 있었다. 집안이 조용할 날이 없었던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기도 했다. 가장 친했던 사람은 줄리아가 아닐까, 생각한다. 거실에서 그녀와 공을 차는 것은(특히 나의 드리블로 그녀를 재끼는 것은) 인생(5살) 최고의 유흥이었다. 당시의 나는 내게 재능이 있단 사실을 스스로 체감할 수 있었는데 운동신경이 뛰어난 것은 지역 축구단을 운영하는 아버지와 전직 육상 선수였던 어머니를 생각하면 퍽이나 당연했다. 당연하게, 난 유소년 축구팀에 들어갔다. FC쾰른으로, 그 너머 바이서 04 레버쿠젠으로, 분데스리가로 갔다. 많은 최연소 기록을 갈아치우며, 무수한 축구인들이 날 주목했다. 샤비 알론소의 휘하에서 분데스리가 무패우승을, 중심에서 이뤄냈으며 VDV올해의 선수를 2년 연속으로 수상해냈다. 이제 레버쿠젠은 내게 너무 작았다. 25-26시즌을 앞둔 내게 선택지는 여럿이었다. 케빈 더 브라위너를 노쇠화로 잃은 맨체스터 시티를 재건하러 가느냐, 날 이끌어줬던 감독 샤비 알론소를 따라 레알 마드리드로 가느냐, 라이벌이자 친구 녀석인 자말과 함께 뛸 수 있는, 가장 안정적인 바이에른 뮌헨으로 가느냐. 혹은, 1년 더 레버쿠젠에 잔류하느냐. 나의 에이전시인 아버지는 조언을 한 마디로 일축했다. 모든 팀들의 말을 들어보고 직접 선택해라. 니미럴. 난 제리와 함께 벤치에 앉아 신세 한탄을 했다. 그는 나의 가장 친한 친구 중 하나였다. 또, 리버풀로의 이적이 사실상 확정된 녀석이기도 했고. 그냥 바이언으로 가지 그래? 그는 그런 제안을 했지만, 난 절대로, 싫었다. 뮌헨만큼은, 그랬다. 일단 분데스리가를 벗어나고자 하는 의지가 컸다. 물론 뮌헨의 감독인 콤파니와 대화도 해봤만 4141이라는 미친 전술을 꺼내드는 걸 보고 당장 뛰쳐나왔다. 또, 지금 뮌헨 회장이 어떤 꼬라지인 줄 안다면 그곳으로 가는 일은 없으리라. 그런 식의 말을 조금 일축해서 말하자 제리는 다른 제안을 꺼냈다. 리버풀로 오는 건 어때? 니미럴. 그의 말을 듣는 게 아니었다. 그러나 하필 리버풀에서의 컨택이 왔던 상황이었고, 아르넷 슬롯 그 뱀 같은 새끼의 혀에 넘어가버려 리버풀로 이적하게 되었다. 니미럴. 분명 프리시즌 때까지만 해도 모든 게 좋았다. 홍콩에 가서 AC밀란과 맞붙었고(여기서도 졌지만. 니미, 난 잘했다.)일본 투어도 데뷔골을 넣는 듯 성공적이었다. 개막 후 커뮤니티 쉴드에서도 비록 패배하긴 했지만 일단 나는 잘했단 말이다. 리버풀의 팬들, 콥들은 날 칭찬했다. 이 다음부터가 문제였다. 모든 건 살라 때문이다. 그의 폼은 저번 시즌 후반기부터 여전히 좆박고 있다. 저새끼가 발롱도르 4위라는
작성일 2025-10-02 작성자 구포대교 좋아요 0 댓글수 1 조회수 29상세보기 -
소설 기타 등등
쓰고 있는 장편소설에 다시 돌아가기 위해 작업 중이었던 미완작들을 여기 올려두기로 했습니다. 간간히 시로 생존 신고는 할 것 같지만 되도록이면 글틴에 글을 덜 올리려고 합니다.그간 감사했습니다.^^(찡긋)어린 동화책한 아이가 있습니다. 아이는 오래도록 문제를 풀다가 답을 구해버렸습니다. 그는 Q.E.D를 적어버리고 싶었으나, 선뜻 확신이 서지 않았습니다. 아이는 어른에게 물었습니다.“아저씨! 문제의 정답은 어디에 있죠? 혹시 봐 주실 수 있나요?”“글쎄다 꼬마야. 너는 아주 똑똑한 아이 같구나. 그렇지만 책을 아주 많이 읽어야해. 책들 속에 답이 있단다.”“아저씨는 책을 많이 읽었나요? 제 답을 좀 봐주세요.”“흠... 아저씨도 그런 건 잘 모르겠단다. 책을 많이 읽지 못해서 말이야. 노인 분께 가보려무나.” 아이는 그 길로 노인을 찾아갔습니다. “안녕하세요? 제 답을 좀 봐주세요.”“무슨 답? 답은 다 알고 있었던 거 아니냐? 너도 나도 다 알고 있는게 정답 아니었냐? 왜 새삼스레 그런 걸 묻고 그러냐 얘야.”“그렇지만 문제가 있었던 걸요.”“어느 모지란 놈이 시간이 남아돌아서 그런 걸 만들어? 이미 넌 정답을 알고 있단다. 애초에 문제같은 건 없었던 게야. 문제가 있다면 만든 사람 잘못이지. 문제를 만든 사람을 찾아가 보거라.”“문제는 누가 만들었는데요?”“네가 가져온 문젠데 네가 알아야 되는거 아냐? 하 참 이거 웃기는 친구구만.”아이는 다시 어른에게도 돌아갔습니다. 기나긴 길이었습니다. “아저씨! 이 문제는 누가 낸거죠?”“어? 얘야. 그 문제는 나는 모른단다. 나는 몰라. 우리 나라가 전쟁에서 졌단다. 도대체 무슨 문제가 있었단 말이냐? 더이상 문제 같은 건 얘기 하지도 말어라. 나는 몰라. 누가 아는 지도 모르고, 누가 낸 건지도 모른다고.”아이는 풀이 죽어 돌아가다가 어느 버려진 성에 모여있는 젊은 이들을 보았습니다.“혹시 문제의 정답을 알아요?”“아니, 어른이나 노인은 그 정답을 모른단다. 그들은 몰라! 그들은 지금까지 아는 척 하며 살아온거야!”그는 술을 한 잔 마셨습니다.“모른다고!”“당신은 아나요?”“중요한가? 원한다면 찾아봐 주지.”아이는 다시 돌아갔습니다. 하지만 아이는 다시 총을 든 사람을 만났습니다. “아저씨! 문제의 정답을 알아요?”“음... 그럼.”그러면서 그는 깃발을 가리켰습니다. Ceaus 'Silver Star' Escublanc에스쿠블랑 준장은 매일같이 다른 정장을 입었습니다. 다만 오늘은 좀 달랐습니다. 오늘 아침, 지난 석달간 쓰고 다녔던 커스텀 빈티지 게릴라 베레모에서 은빛 중국산 계급장을 떼어내고 대신 그것을 검푸른 정당 가슴주머니에 달아 걸었습니다. 아무래도 어제 머리를 다듬었기 때문일 겁니다. 그는 당당히 부사령관실에서 걸어나와 테라스를 돌아보았습니다. “휴우... 이런 걸 얼마나 더해야 될까? 카라타예프.”“피곤해요? 커피라도...”“됬어... 가지 뭐...” 새로 도입한 멕시코산 뉴 카르파티안 인민복을 입은 대중들은 실버스타 에스쿠블랑을 보고는 열렬히 환호합니다. 그들은 에스쿠블랑을
작성일 2025-10-01 작성자 기능사 좋아요 0 댓글수 0 조회수 51상세보기 -
소설 무언가 (글자크기 수정본)
글자 크기 조정을 요청해주셔서 완료했습니다. 혹시나 해당 글을 확인하시는 것을 놓치셨을까 괜히 걱정되어 이렇게 올려놔봅니다. 해당 글로 가시면 글자를 조정하여놓았으니, 혹시 여전히 글자가 이상하다면 다시 한번 글을 남겨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추후 해당 게시물을 확인하셔서 피드백이 완료되면 이 게시물은 삭제 예정입니다.)
작성일 2025-10-01 작성자 노도현 좋아요 0 댓글수 0 조회수 50상세보기 -
소설 식빵 레시피
말캉거리는 식빵에 푹 젖은 우유 식빵처럼 말하기를 배우는 일 그것이 그녀가 지구를 여름으로 회귀시킨 법. 오래되어 단단하게 식은 빵을 들고 따듯해질 때까지 품고 있으면 아침이 오려나. 길고 긴 기다림에 미끄러지듯 다가온 이른 아침의 분주함. 굳이 표현하자면 거부하지 않는 생명들의 유동성을 드러내는 것 같아. 여전히 굳어있는 빵이지만 온기를 나누어주세요. 오븐에 구워버리자니 더욱 딱딱해질까 새까맣게 타 버리면 어쩌지?를 생각하지 않는 방식. 탄 빵도 매력이 있지 않을까 새까만 빵을 가지고 멀뚱히 서면 주위 빛을 가져다주는 거야. 별 말캉해지는 말들을 홀로 툭 던지기.쉽게 말해 헛소리, 어렵게는 창작의 시작.시끄럽게 머리를 울리는 구체의 타이머. 홀로 얼굴을 새빨갛게 붉히며 터질 듯 튀어 오르는 타이머! 이른 아침의 유동성은 빵의 주인보다 흥건한 듯. 늘어지는 손가락으로 오븐 뚜껑을 탁, 연다. 기다렸다 싶이 모락모락 연기가 피어오른다. 알맞게 구웠나? 오버 쿡은 아니겠지◦◦◦.자욱한 수증기를 손으로 휘휘 저어내니 그 형태가 보이는데! 반 정도 탄 토스트가 완성되는 순간이야. 어떻게 가리면 좋을까. 불완전한 토스트를 변신 시킬 궁리 중인 그녀는 무심코 시선 끝에 닿았다. 단풍시럽이 섞인 흑설탕. 메이플 시럽 잼. 한달음에 걸어가 한 손에 쥐었다. 낑낑대며 온 힘을 다했지만 뚜껑은 열릴 기미가 안 보이네. 인상을 찌푸릴수록 손에 자국만 남겠지. 포크 여러 개를 쓱 가져와 시소처럼 질러 넣는다. 그러고는 있는 힘껏 포크를 누른다. 팅! 하고 맑은 소리와 함께 검은 잼뚜껑이 공중으로 도약했다. 우와, 기록이다. 처음 잼 뚜껑을 연 기록!비록 둘 다 휘었지만 이제 잼을 먹을 수 있으니까 괜찮아. 그녀는 아직 식빵이 식지 않음에 감사를 표했을 거야. 파리바게뜨에서 전에 받아오고 어딘가 쑤셔놓은 나이프가 생각난다. 사방을 뛰어다녀 찾아낸 나이프는 플라스틱. 설탕과 메이플 시럽은 오랜 시간 분리되어 층을 이루었다. 변화가 일었다. 갑작스레 들어온 플라스틱 덩어리가 자신들을 휘휘 저어댔다. 굴러온 나이프가 층을 뭉갠다더니. 그거 아니거든. 일체가 된 잼은 이제 끈덕함이 극에 달했다. 뭉쳐 덕지덕지 달라붙기에 손아귀에 힘이 들었다. 양껏 퍼올리자 실을 늘어트리며 한 움큼 떠진다. 달큰한 냄새가 코안으로 스며들어 냄새를 맡으려다, 아. 코에 묻어버렸어. 검지로 슥 닦아 살짝 맛볼까. 으음, 한 입에 넣을 것을 기대하고 그것은 포기했다. 다시 나이프를 들어 빵에 두껍게 펴 발랐다. 점도가 높은 탓에 매끄럽게 발리진 못했지만 실패한 페인트칠 한 듯 골고루는 발랐다. 반으로 접자 딱딱한 빵에서 부스러기가 솔솔 흘러내렸다. 침이 고이는 와중 드디어 입으로 가져다 댔다. 입을 최대로 벌려 한 입 베어 물자 바삭이는 설탕이 혀끝을 타고 아리는 중. 찌릿 찌릿 머리끝까지 전해오는 깊은 당도를 느낀다. 만화에서는 눈에 별이 생기던데, 대충 그랬다. 반짝이는 눈빛, 설탕은 빛을 받아 반짝인다. 달콤함에 취해 금세 다 먹어 치운 토스트. 이제 딱딱하고 오래된 식빵은 없다. 달
작성일 2025-10-01 작성자 서제화 좋아요 0 댓글수 0 조회수 38상세보기 -
소설 금붕어
어둡다. 나는 이미 죽어있다. 이게 죽어있는 게 아니라면 무엇으로 말해야 할까. 한 칸의 침대는 나의 관이 되었고 나는 이곳에서 스스로를 매장시켰다. 마음이 죽었어도 생각나는 그 사람은 나를 밖으로 불러냈다.한참을 말없이 걷다가 멈춰선 그 사람은 고개도 들지 못하고 자길 사랑하냐고 물어보았다. 사랑이라…. 애초에 사랑이 뭔가? 나는 그 사람을 위해 희생하고 싶지 않다. 하지만 자꾸 생각나는 건 내 외로움 때문일까. 너가 아니어도 상관없을 것 같은데. 아. 이 사람. 눈시울이 붉어진다. 떨리는 얼굴 근육을 타고 흘러내리는 물은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나의 심신을 더욱 깨닫게 만들었다. 비참하다.내가 한참 말이 없자 그 사람은 마지막으로 내 눈을 마주 보고 떠나갔다. 눈 안에 담긴 감정을 읽어내고 싶었다. 나는 멈춰있었을 뿐인데…. 그래. 떠나갔다. 나는 이제 정말도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다. 6인실. 1평도 안 되는 구석진 공간. 이곳이 엄마의 마지막 거처가 될 것이다. 엄마의 앞쪽엔 치매 걸린 노인이 있다. 매일 고함을 지르는 노인을 원망하진 않았다. 오히려 측은한 마음이 들 뿐이었다. 나의 노모에겐 어떤 꿈이 있을까. 하루 중 대부분을 잠만 자는 노인은 신생아와 다를 것이 없다. 다른 점이라면 신생아에겐 미래가 있고 노인에겐 죽음이 있다는 것.연하 곤란으로 콧줄을 통해 유동식을 제공받는다. 줄은 코에서 위까지 연결되어 있어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닐 것이다. 잘 때 무의식적으로 콧줄을 잡아빼는데 이를 방지하기 위해 손이 묶여있다. 무슨 죄를 저질렀길래 이런 고문을 받는 것일까. 나약해진 육체로 죄수보다도 못한 취급을 당해야만 하는 엄마의 정신은 어떤 심정일까. 늙은 것이 죄인 것인가. 살아간다는 건 늙어가는 것인데 사는 것이 죄인가. 엄마는 내가 어렸을 때 보던 엄마가 아니다. 너무 작아졌다. 너무 작아져서 겉가죽이 남아도는 건가, 한없이 주름진 피부는 엄마의 나이테가 되었다. 겉가죽에 빨대를 넣어 불어주면 빵빵해질까? 헬륨가스를 넣어 풍선이 된 엄마가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상상을 하며 손으로 애써 피부를 펴보았다. 두껍고 투박해진 손은 엄마의 예전 고운 손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검버섯은 죽음의 그림자인가 온몸을 덮어간다. 엄마의 숨소리는 거칠다. 기관지와 폐엔 가래로 가득 차 있어 숨 쉬는 것조차 버거워한다. 그래서 콧줄을 빼주었다. 생각보다 부드럽게 빠진 콧줄에 나름 만족스러웠는지 곤히 자는 엄마는 편안해 보인다. 죽겠다고 소리 지르던 엄마에게 드디어 소원이 이뤄지는 순간이었다. 병실을 나와 간호사 데스크에 다가가 콧줄을 빼버렸다고 했다. 제대로 들었으면서 재차 묻는 간호사의 표정을 바라보았다. 잠시 평화로웠던 간호사실이 약간 부산스러워졌다. 어쩌겠는가 내가 할 수 있는 건 이제 없다. 병원을 나와선 캄캄함 사이 빛을 찾았다. 밤하늘 그곳엔 달이 떠 있다. 그믐달로 져버리는 달은 그 속이 텅 비어 있었다. 달보다 도로를 달리는 차의 불빛이 더 밝다. 눈이 부실 지경이다. 차는 매우 빠른 속도로 달려 헤드라이트의 잔상을 만들어 냈다.
작성일 2025-10-01 작성자 안녕 좋아요 0 댓글수 1 조회수 67상세보기 -
소설 태초에
태초에"혼돈이, ""물이, ""전지전능한 하나님이, ""빛이, ""말씀이, " "무(無)가, " "어둠이, " "끝없는 바다가, "있었다. 아니야--- 조금 바꿔볼까. 태초에 필연이있었다. 모든 것은 있어야 하기 때문에 있다. 미래는 현재에 의해, 현재는 과거에 의해, 과거는 과거보다 먼 과거에 의해 조각된다. 그리고 과거보다 먼 과거--태초. 태초에 필연이 있었다. 우주는 주기성을 가진다. 엔트로피가 증가하기만 하다가 결국 어떤 입자도 서로를 만나지 못하게 되고, 어떠한 규칙도 차례도 없는 상태에서 엔트로피가 감소하기 시작하고, 어쩌다 한 점에 모인 입자들의 엔트로피가 다시 증가하고... 빅 크런치와 빅 바운스를 거친다. '아난케'는 모든 것의 시작점을 조정한다. 빅뱅을 설정한다. 그녀는 셀 수 없이 많은 유한한 우주를 관측했다. 그녀 자신은 유한하지 않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지금은 저번의 우주에서 아쉬운 것을 보완하는 되먹임의 단계에 있다. 요컨대 시작선을 긋는 작업인 셈이다. "가장 아쉬웠던 건... 아무래도, 지구려나. 꽤 재밌는 행성이었지. 인간들이 쓸데없는 짓만 안 했어도 훨씬 오래 갔을 텐데..."혼잣말로 구상하는 긴 시간은 그녀에겐 찰나에 지나지 않았다. 무한 앞에선 어떤 큰 수도 0에 가까워 보이는 법이다. "어쩌면 '개념(concept)'에 영혼을 준 것이 잘못이었을 수도. 허상에서 나온 신념 때문에 많은 시간을 낭비했지. "그녀는 세상에 존재하는 것, 만질 수 있는 것, 원한다면 하나하나 셀 수도 있는 것들을 보았다. 세상에 존재하게 될 입자들을. 그녀는 페르미온에 혼을 불어넣었다. 그리고 빅 바운스--빅뱅이 일어났다. 업 쿼크(+1/3), 다운 쿼크(-2/3), 전자(-1), 천장 쿼크, 바닥 쿼크, 야릇(strange) 쿼크. 양성자, 중성자, 전자. 그리고 첫 번째 원소. 수소. 그녀가 눈을 떴다.
작성일 2025-09-29 작성자 아이오딘 좋아요 0 댓글수 1 조회수 103상세보기 -
소설 좀비랜드에서 만나요
좀비랜드는 매년 10월이 되면 매표소 옆에 대형 현수막을 건다.〈살아남을 자신 있습니까?〉대부분의 손님들은 그걸 그냥 마케팅 문구쯤으로 여긴다. 귀신의 집 같은 거지. 어차피 진짜 죽는 거 아니니까.“야, 근데 진짜 같지 않냐?”“와 진짜 리얼하다. 입에서 침 흘리는 거 봐.”“아, 그건 요즘 알바들 디테일이 살아서 그래. ”“아니, 저 사람은 입술이 없잖아. 그런 특수 분장이 있어?”무심코 지나친 다른 손님들 사이에서도 수군거림이 퍼졌다.그날, 놀이공원 공식 인스타그램에는 이렇게 적혔다.올해의 좀비 퍼포먼스는 _사상 최고_입니다!살아남으셨나요? 99.9%의 생존률, 믿고 입장하세요!#좀비랜드 #할로윈이벤트 #리얼호러사람들중 한명이 퇴장 게이트 앞에서 어색하게 웃는 직원에게 물었다.“저기, 안에서 본 분 중에... 팔이 반쯤 떨어져 나간 분이 있었는데요. 그건 특수분장이죠?”직원은 미소를 유지한 채 대답했다.“손님, 오늘도 무사히 생존하셨습니다. 축하드립니다.”“…네?”“사진 인화 서비스는 오른쪽 부스에서 진행 중입니다. 15분 소요됩니다.”“아니 그게 아니고요—”직원이 손에 뭔가를 쥐어주었다. 작은 쿠폰이었다.〈당신은 살아남았습니다!〉 보상: 좀덕바 교환권 + 생존 기념 메달 (한정판) 어쩐지 찝찝한 마음을 안고 돌아섰다. 분명 그 남자의 눈동자는… 탁한 회색빛이었다. 마치 썩어가는…전부터 이상하긴 했지만 뉴스엔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좀비랜드’에선 매년 몇 명의 사고가 있었고, 그건 항상 사소한 것으로 처리됐다.“물린 흔적은? 그거 그냥 분장에 놀란 거라더라.”“실종? 그 애는 원래 가출 상습이었대.”“시체요? 그거 할로윈 데코라잖아.”이상한 건, 매년 실종자가 비슷한 숫자라는 거였다. 0.1% 놀이공원 하루 평균 방문객 수가 4,000명이라면, 그건 하루에 4명이라는 뜻이다. 어느새 사람들이 그 숫자에 익숙해졌다.“0.1%면 뭐, 거의 없다는 얘기지.”“진짜 좀비라도 있나봐, 하하.”“너 이번 주말에 같이 가자. 커플룩 맞춰서.”좀비랜드의 내부 규정 제12조에는 이런 문장이 있다.“관람객은 좀비와의 물리적 접촉을 시도하지 않아야 하며,좀비에게 물린 경우 해당 행위는 본인의 책임으로 간주합니다.”그리고 백스테이지, 스태프 휴게실에는 이런 공지가 붙어 있다.“진짜 좀비를 발견한 경우, 조용히 퇴장하세요. 그들은 당신이 진짜인지 알아보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단, 자세히 들여다보지 마십시오. 그들도 굶주려 있습니다.”놀이공원은 오늘도 열려 있다. 현수막은 바람에 펄럭이고, 좀비 스태프들은 웃고 있다. 그 중 몇 명은 웃지 않는다. 그들의 턱은 기괴하게 흔들리고, 눈빛은 오래된 창문처럼 뿌옇다. 그리고 당신은, 사진 속 자신의 눈이 조금 달라졌다는 걸 느낀다. 희미한 회색… 아니, 착각이겠지.당신은 살아남았습니다.그러나, 영원히 인간으로 남을 수 있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작성일 2025-09-28 작성자 나르시스 좋아요 1 댓글수 1 조회수 124상세보기 -
소설 어변성룡
하늘은 생의 높이, 바다는 생의 깊이. 자연에 풀어 말하면 높고 깊음도 잴 말이 있고 삶은 푸르른 형체를 얻는 것이었다. 아마 갑진년의 이야기였다. 바닷길을 통해 명으로 사신을 가던 행렬이 있었다. 바다의 그날 변덕은 물너울을 탄 사행단에게 온후한 은덕이었다. 눈 닿는 데까지 자르르한 대해는 하늘보다도 평온했고, 만경장파를 아우르며 뻐끔일 포말은 천공을 지키는 행운行雲보다도 잠잠했다. 굳은 얼굴의 사공까지 수면의 부드러운 일렁임을 즐길 수 있는 한때였다. 노곤한 조천사 일행을 싣고 수평선을 몇 번이나 가르며 나아가던 배는 눈앞에 불쑥 솟은 해도에서 멈추었다. 뭍에서 몸을 풀고자 잠시 닻을 내린 이들은 모래톱과 수풀로 이루어진 작은 땅의 거죽을 체감했다. 제법 오래 머무른 뒤였다. 이색의 수목과 연안 천해상의 조화로 원기가 난 사행단은 마저 이동할 채비를 마쳤다. 종사관은 축추근한 목화에서 펄을 털었고, 사공이 가라앉힌 닻을 거두어들였다. 이변의 신호탄이었다. 시작은 한 줄기 낯설고 스산한 바람이었다. 불어온 방향은 섬 안쪽이었다. 특별히 의식할 규모의 실체성은 아직이었다. 그러나 흐름의 강도가 거친 실타래 격으로 부상하더니, 이내 줄기줄기 찢어지고 뻗어 나가 선체를 휘감는 번듯한 위협이 되었다. 적재한 짐이 요란하게 부대꼈다. 일행은 공통된 불길한 예감으로 눈빛만 교환하기 바빴다. 노련한 사공은 굳기도 잠시, 서둘러 배를 물리려 들었다. 하지만 분주한 대처를 섬은 읽은 양 매서운 바람을 새끼줄과 같이 꼬았다. 수 셀 수 없는 맹풍 가닥을 삭도해 탄생한 회오리가 휘두른 도끼날의 양상으로 날아오자 돛은 울부짖을 따름이었다. 나아가기는커녕 금방이라도 뒤집힐 처지였다. 선체가 휘청거리는 틈에 격랑이 일어나 배의 옆구리를 후려쳤다. 순하던 물결은 배를 앞으로 밀지는 못할망정 뒤엎겠다는 기세로 사납게 뱅뱅 맴돌았다. 이 지경의 해안은 소용돌이치는 우리와 다르지 않았다. 마치 배곯은 섬이 숨을 불어넣어 바다를 어지럽히고 제물을 받아 가려는 듯했다. 순식간에 무력해진 사행단은 그저 어안이 막혀 있었다. 그러자 사공은, “필시, 배 안에 용왕이 가지려는 물건이 있는 까닭입니다. 앞서서 공양하면 무사하겠지만 가만히 있다가는 분명 위태로워집니다.”라고 비장하게 말을 꺼냈다. 미신도 위기 속에서는 실학이라고 삼사신三使臣의 귀중품까지 명에 진상할 방물을 제외한 거의 모든 물건을 내던지고 변화를 살폈지만 바람은 잦아들지 않았다. 이에 사공이 서둘러 나머지 지식을 보탰다. “그렇다면 잡으려는 인간이 있어서 이럴 겝니다.” 사행단은 일행을 한 명씩 섬에 내려놓는 방식으로 사공의 가설을 시험했다. 정사의 주도로 차례차례 하선해 보았으나 아무 차이가 없어 전원 배로 복귀했고, 마지막으로 역관만 남은 상황이었다. 그런데 그가 배를 뜨기 무섭게 주위가 조용해지는 게 아닌가. 이윽고 여럿이 입을 모아 말하였다. “안타깝게 되었다지만은 어쩌겠는가?” 그들은 역관이 소지했던 행장을 꺼내 건넸고, 식량도 잔뜩 내려놓았다. 결국 두고 떠나기 위함이었다. 그곳은 원래 누구도 살지
작성일 2025-09-28 작성자 지존 좋아요 0 댓글수 1 조회수 127상세보기 -
소설 로즈메리의 기적
로즈메리의 기적어쩌면, 그건 그저 한여름날 밤의 꿈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너무나 현실감이 없어서. 그런데도 그게 이상하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아서. 그렇지만 꿈이라고 하기에는 수많은 시간이 흐른 지금까지도 그때의 기억이 머릿속에 남아 있다. 마치 실제로 겪었던 일처럼 선명하게.그때는 12살의 여름이었다.“소필리아! 준비 다 됐니?” 여름방학을 맞아 나는 오랜만에 삼촌네 집으로 놀러가게 되었다. 올해 방학에는 삼촌네 집 근처에서 열리는 여름 캠프에 참가할 예정이었기 때문에 준비할 게 많았다. “네, 엄마! 짐 다 챙겼어요!” “우리 딸, 가서 잘 지낼 수 있지? 삼촌 말씀 잘 듣고. 가서 재밌게 놀다 와.” “그럴게요, 걱정 마세요.” “그래, 나중에 보자.” “네, 그럼 저 갔다 올게요!”곧 삼촌의 차가 보였다. “소필리아! 오랜만이구나. 못본 사이에 많이 컸네.” “그럼요, 저도 이제 12살이라고요.” 오랜만에 만난 삼촌은 전보다 훨씬 밝아진 것 같았다. 서로 간단하게 인사를 나누고, 짐을 트렁크에 다 실은 후, 드디어 글리사테로 출발했다. 나는 부모님이 시야에서 멀어질 때까지 차창 너머로 손을 흔들었다.그라니타에서 글리사테까지 가는 데에는 꽤 시간이 걸리지만, 삼촌과 대화하느라 시간 가는 줄도 몰랐다. 오랜만이라 조금 어색하긴 했지만, 삼촌의 유쾌한 성격 덕분에 어색한 분위기는 금방 풀어졌고, 차 안에는 두 사람의 웃음소리로 채워졌다.‘삼촌이랑 이렇게 대화하는 게 대체 얼마만인지..’ 사실, 삼촌은 12년 전, 내가 아직 엄마 뱃속에 있었을 때 숙모와 결혼식을 올리셨다. 삼촌과 숙모는 결혼하고 나서도 행복하고 알콩달콩하게 사셨는데, 몇 년 전, 갑작스럽게 숙모께서 돌아가셨고, 그때부터 삼촌에게도 큰 변화가 찾아왔다. 유쾌하고 밝던 삼촌은 말을 거의 하지 않으셨고, 많이 날카로워지셨다. 너무 갑작스러운 삼촌의 변화에, 어렸던 나는 삼촌이 무서워 조금 멀리하게 되었다. 그렇게 오랫동안 그 상태로 숙모를 그리워하며 지낼 것 같던 삼촌은, 지금 이렇게 우울증을 극복해서 예전처럼 밝게 지내신다. 나는 삼촌과 이렇게 웃으면서 다시 대화할 날이 올 줄 몰랐다. 그건 삼촌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아직 조금 어색하긴 하지만, 나는 지금의 밝고 유쾌한 삼촌이 좋다. 그리고 아마, 숙모께서도 삼촌이 매일 슬픔과 외로움에 빠져 지내는 건 원하지 않으셨을 것이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곧 삼촌의 집에 도착했다. 삼촌의 집은 우리 집보다 크고, 주변의 풍경과 잘 어우러져 볼 때마다 감탄사가 나오는 곳이었다. “삼촌 집은 볼 때마다 더 멋있어지는 것 같아요.’ “그러니? 그렇게 생각해줘서 고맙구나. 일단 짐은 다 꺼냈으니 다 가지고 방으로 올라가 있으렴. 네가 쓸 방 어딘지 알지?” “네, 당연하죠. 아 그런데 오늘 저녁에는 뭐 먹어요?” “뒷마당에서 바베큐 할 생각이란다. 괜찮지?” “네! 완전 좋아요!” 삼촌이 구워주시는 바베큐는 언제나 맛있었다. 그동안 못 먹어서 그리웠는데.... 오랜만에 바베큐 먹을 생각에 신났던 나는 얼른 2층 방으로 올라갔다.방은
작성일 2025-09-27 작성자 유리스 좋아요 0 댓글수 1 조회수 157상세보기 -
소설 상자 속의 사람
녹은 아스팔트, 끈적이는 초콜릿. 입안에서 엉겨 붙어 떨어지질 않는다. 발도 무겁고 개운함은 개나 줘버린 그런 날, 무심코 시작된 건 종말이라는 것. 거대한 세계는 아니고, 내 조막만 한 미시세계의 종말이다. 신발코를 건드린 검은 타르는 액체의 물성으로 발을 잡아끌었다. 시선을 들어 올려 고개가 끌려간 곳은, 잔가지 뻗은 거대한 아스팔트 웅덩이 한가운데다.그 위에 녹아든 것은 자그마치 구 년의 인생. 앞서 펼쳐질 조그만 아이의 필름이 덕지덕지 엉겨 붙어 형체를 알아볼 수 없게 되었다. 아이야, 조금은 안타깝구나. 혹시 정점이란 돌아오지도 않고, 부질이라곤 가버린 시간. 그런 형편없는 시간이 너 대신 넘어갈 수 있었을까.지독한 화학품의 냄새가 코를 비틀며 들어올 때, 정확히 현혹되었다. 검은 타르에 발이 닿아 끈적하게 붙들릴 때 벗어날 수 있었다. 이번 도망 길을 택하면 다음번 선택은? 아니, 선택을 할 수 있을까. 뜨거운 열기 속 생겨난 덫에 처박히지 않을 거라 단언할 수 없음을 직감했다. 과연 그것은 이성적인 판단이었는지 모르겠다. 확실한 것 하나, 깊은 기시감에 잠겨 헤어 나오지 못했다는 것이다.두 발이 모두 단단히 붙들린 것은 그리 늦지 않았는데, 자유로운 두 손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내리쬐는 태양빛은 올바른 정신을 혼미하게 했고, 올바르지 못한 정신에는 경외심을 심어 주었다. 다가서지 못했던 신성한 동기에 피어난 미련 한 가닥. 고 하나 남기려함을 알아챈 이성이 마모되어 속삭인 것. 주제넘은 동정심은 후세에 길이 남을 수준이었건만, 검은 웅덩이는 빛뿐 아니라 분별력도 흡수했는가. 결론으로 태양은 어떤 의도도 없었다. 본분을 성실히 이행한 모범 생물. 그뿐이었고, 게으른 인간이 구차하게 관대한 대자연의 속을 긁을 뿐이었다. 그를 우리는 뼈저리게 알고 있었다.점점 더 묽게 녹다 어느 순간, 굳은 물성에 직립보행은 쉽지 않았다. 고작 2미터 남짓. 하지만 이 상태로는 고작이 아니라 무려. 무려 다섯 발자국은 족히 남았다. 머뭇거림은 접고 엉성하게 두 손을 아스팔트 위로 짚었다. 신발을 신은 발과 비교할 수 없이 뜨겁다. 단출한 뜨거움이 아닌, 닿은 순간부터 겉이 익는 듯한 고통이 밀려왔다. 미간이 크게 찌푸려지고, 순간 스치는 생각. 아이의 뺨에 입은 화상에 대한 염려가 들었다. 곧 죽을 고통에도 정의를 찾는 자신에 눈물 나는 도취감을 가졌다. 물론 일순간에. 통감이 사라지길 빌었지만, 그보다는 속에서부터 간절히 끓어오르는 염원. 자신의 삼분의 일조차 갖지 못한 시간을 구원하고 싶었다. 저 작은 시간 속 저지른 어떤 잘못도 크지 않을 것이다. 홀로 검은 늪에 빠짐을 알고 있다면, 그 얼마나 두려울까. 이 어린 양을 구원하지 않는 것은 죄악일 것이다.살려주세요, 그 한마디가 있었더라면 기꺼이 무릎을 내어 기어가지 않을 텐데. 소리 내어 요청하는 도움에는 소리 내어 응답할 수 있는 사람이 들러붙겠지. 하지만 가장 원초적으로 무력함을 드러낼 때 나는 직감한다.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겪겠노라고. 이에 이끌려 다가오는 동정의 무리 중 하나가
작성일 2025-09-25 작성자 서제화 좋아요 0 댓글수 1 조회수 202상세보기 -
소설 교환 일기
1.프리지아지니 요정: 이젠 뭘 찍어도 여름 느낌이 난다?진이가 보낸 메시지 아래로 따로따로 전송된 사진 몇 장을 천천히 넘겨보다 픽, 바람 빠지는 소리로 웃었다. 그냥 한 번에 보내도 될 텐데 매번 이런다니까. 덕분에 마음이 너덜너덜해서 화면 위로 손가락을 내리는 일에서조차 흥미를 느낄 수 없는 날에도 진이가 보내온 사진을 확인할 수 밖에 없다. 사진을 클릭하는 작은 동작도 필요하지 않도록 보내 놓는 그 방식 때문이다. 모든 사진에서 묻어나는 진이만의 시선을 따라가다 보면 결국 마지막 사진을 내릴 때 쯤에는 왠지 조금 외로워지곤 하지만. 근데 얘는 또 어딜 다녀온 걸까. 마지막, 노란 프리지아 한 다발은 아마 꽃시장인 것 같다. 진이는 익숙하지 않은 버스 번호를 무서워하지 않는다. 버스 노선도도 잘 살피지 않고 훌쩍 올라타서는 아무 데서나 내려 금세 마음에 드는 곳을 찾아내고 그제야 지도 앱을 켜고 즐겨찾기 목록에 항목 하나를 더하는 식이다. 그렇게 만들어진 진이의 지도는 곳곳에 하트 모양이 이정표처럼 솟아 있다. 진이는 그것들에 도피처라는 이름을 붙이고 마음 내키는 대로 하나를 골라 훌쩍 떠났다가 짧게는 몇 시간, 길게는 1교시 끝을 알리는 종소리와 함께 학교를 빠져나가 불을 환하게 켠 건물이 아이들을 토해내는 시간까지 머물다 오고는 했다. 더 길게 머물 수 있을 텐데도 진이는 내가 학원 건물 입구를 나서는 시간에 그 앞에서 기다렸다가 아파트 단지를 향해 가는 지겨운 길을 함께 걷기 위해 적어도 9시에는 버스에 올랐다. 나를 자신의 도피처로 데리고 가는 일이 손에 꼽는데도 서운하지 않은 이유다. 우리가 각자의 자리에서 얼마나 다른 하루를 보냈는지와는 별개로, 그 끝에서 우리의 시간이 반드시 겹친다는 믿음이 있으니까. 그럼에도 걔가 나 없이 보내는 하루에 서운하지 않다는 게 내 하루를 외롭지 않게 만들지는 못한다는 게 가끔은 버겁다. 남진의 세계가 나보다 크다는 건, 우리가 떨어져 있는 시간이 길어질 때마다 나를 작아지게 했다. 생각 끝에 결국 이런 마음이 되는 내가 좀 미워지는 건 말할 것도 없고. 마지막 사진에 답장을 보냈다.예쁘다뭐 사 왔어?곧바로 읽음 표시가 뜨더니 메시지 몇 개가 연달아 도착했다.지니 요정: 프리지아랑지니 요정: 선인장 작은 거지니 요정: 너 어디야?집이라고 하니 나오라는 답이 돌아왔다.지니 요정: 나와바아지니 요정: 너 집 앞인데 줄 거 잇어아파트 현관으로 나서자마자 진이가 장난스럽게 한쪽 무릎을 꿇으며 노란 프리지아 다발을 건넸다. “이거, 이제 정식 프로포즈”“아, 진짜 미쳤어?”등을 퍽퍽 때리자, 진이는 얼굴을 찌푸리다 웃으며 일어섰다.“왜, 별로야? 안 예뻐?”“저기요…. 그런 걸 말하는 게 아니잖아요?”“왜, 대만 가면 되지”그러더니 대만은 법적으로 동성의 결혼을 인정해 준다느니, 우리 어른 되면 한국도 그럴지도 모른다느니 이상한 소리를 해댔다. 그런 변화가 생길 만큼 20살 생일이 멀리 있기라도 한 것처럼. 평소처럼 핀잔을 몇 마디 더 보탤까 하다 3년 뒤 이맘때쯤에는 이런 만남 후에 서로의 아파
작성일 2025-09-23 작성자 listener J 좋아요 0 댓글수 1 조회수 213상세보기 -
소설 무언가(無言歌)
이명(耳鳴)의 시작은 추석 다음 날부터였다.*어머니가 나이 오십에 예정에 없던 나를 임신하셨을 당시 아버지는 젊은 과부와 바람이 나 집을 떠났다고 외할머니께선 말씀하셨다. 그 말을 듣고선 어머니께 과부가 무엇이냐 묻는 만행을 저질렀던 적이 있다. 갑작스런 딸의 질문에 뭐라 말 한마디 덧붙이지 못한 채 화장실로 뛰쳐들어가신 어머니가 몇 분이 지난뒤에 다시 밖으로 나오셨을 때 그녀의 양볼이 붉게 물들어 있는 것을 나는 보았다. 세안을 하셨다는 것을, 그리고 그것은 분명 눈물이 흘러 그것을 숨기기위해 그런 것임을 일곱살의 나는 알고있었다. 그 후로 나는 단 한번도 아버지에 대해 어머니께 여쭤본 적이 없다. 또한 내가 아는 한 그녀는 그 이후 단 한명의 남성과의 만남도 진척시킨 적이 없었고 나 역시 어린 시절 알고 지내던 친척 몇이 있기는 하였으나 고등학교를 졸업하던 해를 끝으로 연락하는 이 하나 없으니, 외할머니가 돌아가시고 난 뒤 거진 이십년 가까이 나와 어머니는 서로가 서로의 유일한 가족이었다.그리고 지난 겨울, 여든 아홉의 연세로 돌아가신 어머니를 마지막으로 나에게 더 이상 남은 친정은 없었다.*혼자가 되버린 내가 맞이하는 첫 추석에 그리 변하는 것은 없었다. 다만 예년처럼 제사 다음날 아침을 먹고 두어시간이 지나고 친정으로 가는 일이 없이 시댁에 머물러 있다 다음날 오후에 다시 집으로 돌아가기로 한 것 뿐이었다. 차를 몰고 경부고속도로를 빠져나가며 우리는 휴게소에 들렸다. 그 이후로도 분명 두어시간은 더 깨어있었으나 잘 기억나지는 않았다. 그저 어느새 하늘이 검붉게 변해있는 것을 보며 기지개를 폈다.“남해고속도로지 지금?”“깼나. 이제 진주 아이씨로 빠진다.”“아 맞나. 깜빡 잠들었네. 잠 안 와?” "괘안타 이제 다 왔다.”...초인종을 누르려던 차에 현관문이 열려있다는 것을 알아챘다. 경부고속도로를 달리던 길에 어머니와 통화를 한 것은 거진 여섯시간도 더 전이었다.“어머니, 저희 왔어요.”어, 왔나.거실 바닥에 깔려있는 대자리에 앉은 채 그녀는 반야심경을 외우고 있었다. 쓰고있던 안경을 벗어 바닥에 두고서 그녀는 냉장고로 향했다.밥 안 무제? 여 앉아라.거실에 펴진 작은 탁상에 그녀는 오찻물과 제사 때 쓸 육전 일부를 올렸다. 남편은 안방에 짐을 풀고서는 탁상에 가 앉았다. 나는 김치를 써는 그녀 옆으로 가 큰 솥에서 탕국을 국그릇에 옮겨담았다. “음식 다 해놨나?”내가 국그릇을 탁상에 내려놓으며 막 자리에 앉던 차에 남편이 의아한 말투로 그녀에게 물었다.오야.나는 그녀의 답에 흠칫했다. 원래도 시어머니가 거의 모든 음식을 준비하셨다곤 하나 튀김과 찌짐 종류는 명절 당일 새벽, 아가씨와 함께 부치는 일리 다반사였기 때문이었기 때문이다. “찌지미도?”오야. 다 해삣다. 평소에도 많은 양은 아니었으나 그럼에도 노동이었던지라 그녀의 말에 위안 일환의 무언가가 느껴지는 것만 같았다. 어쩐 일로 미리 다 해놓았느냐하고 묻고싶기도 했으나, 귀찮은 일 미리 끝내놓은 것에 마치 아쉬워 따지는 투가 될까 그저 국을 입에 넣었다.씻고 나오니 열한
작성일 2025-09-23 작성자 노도현 좋아요 0 댓글수 1 조회수 639상세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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